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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주인공》후속보도(6) 졸라편

편집/기자: [ 김룡,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2-05 09:26:31 ] 클릭: [ ]

--연변사람이 된 자이르초원의 흑인소년―용병 졸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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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
 

아프리카에서 왔다면 많은 사람들은 사하라사막을 떠올리고 사막에서 맨발로 달리는 흑인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졸라가 태여난 자이르(1997년부터 꽁고민주공화국)의 서남부 적도에 위치한 반둔두성은 열대우림기후 지역으로서 열대삼림과 열대초원이 이어진 아름다운 곳이다. 

 

1970년 여름, 수도 킨샤사에서 600여키로메터 떨어진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졸라는 어려서부터 축구에 매료되여 저녁 늦게까지 동네 아이들과 뽈을 차군 하였다. 그 고장 아이들은 연변의 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하는지 다섯살에 소학교에 입학한 졸라는 뽈도 잘 찼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였다. 

 

“학교마당이나 마을의 공지에서 백여명의 어린이들이 몰켜 뽈을 찼지요. 내가 뽈을 몰고 아이들 속을 요리조리 헤쳐나오는 것을 보고 엄마는 엄지손가락을 내들었고 아빠는 그만 차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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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주정부 리룡희 전임주장과 대화하고 있는 졸라. 

 

교육자인 졸라의 부모는 졸라의 미래를 두고 언성을 높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어머니는 축구선수가 꿈인 졸라의 편을 들었고 아버지는 훌륭한 대학에 가서 의사로 될 것을 바랐던 것이다.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졸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꼴을 넣으며 학교축구장의 스타로 되였고 또 학습성적도 앞자리를 차지하여 고중을 마치는 1987년엔 킨샤사대학에 입학지원서를 넣기까지 하였다. 그를 더욱 훌륭한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하여 그의 아버지는 가정을 이끌고 킨샤사로 이사까지 왔으나 이미 열일곱살의 청년이 된 졸라의 주장을 굽힐 수 없었다. 

 

킨샤사의 유명한 축구구락부인 비타구락부(VITACLUB)를 헐금씨금 찾아간 졸라는 복잡하고도 세밀한 입단 전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구락부에 입단한 것이다. 대학을 다니기 위하여 수도에 올라온 아들이 축구구락부에 입단하자 그의 아버지는 너무도 섭섭하여 몇년 동안 그와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타구락부에서 졸라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즐거웠다. 엄격한 체력훈련도 그는 즐거웠다. 매일같이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지만 그의 얼굴은 항상 웃음이였다. 혹간 청년팀을 대표하여 경기를 치르는 날이면 뜬눈으로 밤을 새울 정도로 흥분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그가 1년 만에 구락부를 대표하여 경기를 치르게 되였고 데뷔전에서 대방의 수비수를 따돌리고 첫꼴을 작렬시키면서 대뜸 킨샤사축구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열여덟살에 축구유망주로 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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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팀시절의 졸라.(방태호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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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팀시절의 졸라.(방태호 찍음) 

 

1994년엔 국가축구대표팀의 부름을 받고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게 되였는데 1996년까지 국가대표팀의 공격수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그 시기 자이르의 국내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1965년에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모부투가 1990년대초에 경제위기를 맞으며 서방 채권국들의 강한 압력하에 다당제 민주주의와 권력분배를 수용하였으나 1997년 5월, 로랑ㆍ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 의해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바로 졸라가 한창 축구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그의 조국은 심한 내전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였고 모부투 정권하에서 수십년 동안 루적된 경제적 실책과 정치적 부패는 이 나라의 경제기반을 황페하게 만들었는바 그 결과 자이르는 전 세계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렬악한 나라로 전락했다. 

 

졸라가 연변행을 결심한 시점도 바로 그 때였다. 국가팀 선수였지만 후진국이다 보니 로임도 제대로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1997년 1월, 이미 결혼하고 아들까지 둘을 둔 그는 생계를 위해 한국 중개인의 소개로 한국 성남일화축구구락부에 와서 훈련하다가 곤명으로 날아와 연변오동팀에 합류하였다. 첫해에 다섯꼴을 기록하면서 연변축구팬들을 기쁘게 할 때 그의 조국은 국명을 꽁고민주공화국으로 개명하였고 훈련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던 국가대표팀에서는 그와 련락할 방법이 없어 국가팀에서 그의 이름을 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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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팀시절의 졸라.(방태호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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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오동팀 대 대련만달팀과의 경기에서의 졸라.(방태호 찍음)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조국에 있는 가족이 근심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그 시기 졸라의 마음속에는 오직 가족과 그들의 생계였다. 그의 사정을 헤아린 구락부에서는 1998년 시즌에 그와 방근섭, 리시봉이 갑B팀이였던 천진태달에 가서 뽈을 차는 것을 비준하였다. 그 후 다시 연변팀에 돌아온 졸라는 1999년, 2000년 시즌에서 네꼴과 일곱꼴을 기록하였으며 35세 나던 2005년에는 열세꼴, 2006년과 2008년에는 각각 아홉꼴과 여섯꼴을 기록하면서 연변팀을 위해 혼신을 불태웠다. 

 

연변팀에서 뽈을 차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를 꼽으라면 그는 최은택 감독의 지도하에 갑A 4강의 기적을 올린 1997년 시즌의 한 경기를 꼽는다. 바로 8월 3일,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치른 제13륜 대련만달팀과의 경기이다. 그 날 경기에서 전반전까지 최고강팀과 0: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는데 경기장에는 5만여명의 축구팬들이 운집했다. 서로 절주 빠른 맞공격을 펼치던 후반전 65분경, 고종훈선수의 그림 같은 가랭이패스가 달려가는 졸라의 앞에 이어졌다. 민첩한 졸라가 가동작으로 대방수비수를 따돌리고 꼴문을 향해 슛― 천금 같은 꼴이 터졌다. 순간, 연길시인민경기장은 환호소리로 들끓었고 졸라는 자이르의 전통춤동작으로 세리머니를 하다가 축하하러 달려온 동료선수들에게 묻혔다. 이 날 경기에서 2:0으로 앞서다가 결국 두꼴을 내주고 빅었지만 졸라는 아직도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기장 밖의 소나무에 매달려 경기를 관람하던 축구팬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다가 떨어져 크게 상했다는 이야기는 후문이지만 역시 연변의 축구팬들이 그만큼 졸라를 인정했다는 표징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총명하고 공부를 잘했던 졸라는 프랑스어, 꽁고어, 영어, 뽀르뚜갈어에 비교적 능숙하였는데 중국에 와서 연변, 중경, 천진 등지에서 11년간 뽈을 차면서 한어와 조선어까지 배워 어지간한 대화까지 할 수 있게 되여 어디를 가나 통역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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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쿠리바리선수를 훈련시키고 있는 졸라. 

 

2008년에 연변에서 퇴역한 졸라는 2009년과 2014년에 연변팀 조리감독을 맡았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연변체육운동학교에서 축구꿈나무들을 양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가족에 대해 졸라는 안해와 아들들은 모두 축구를 좋아하고 있으며 또 그만큼 연변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현재 안해는 연변대학에서 외국어교수로, 큰아들은 연길시제2고급고중(조선족학교), 둘째아들은 연길시4중(한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명실공히 연길사람이 된 자이르의 초원에서 달리던 소년공격수 졸라의 이야기이다. 

 

/길림신문 김룡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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