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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과 비슷한 장가계를 다녀오다(하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1-13 13:32:17 ] 클릭: [ ]

하수고리(贺帅故里)와 장가계렬사릉원

하룡생가 맞은켠에 위치한 하룡기념관

식칼 두자루로 혁명을 시작한 하룡(1896-1969)원수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히 아는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군사가로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창시자와 령도자의 한사람이다. 1927년 8월 1일, 국민혁명군 제20군 군장, 당외인사의 신분으로 유명한 남창봉기의 총지휘를 맡고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첫 무장봉기의 첫 총성을 울린 하룡원수의 생가가 바로 장가계시구역에서 약 80킬로메터 떨어진 상식(桑植县)현 홍가관(洪家关)바이족향 천욕촌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편하게 뻐스를 리용하였는데 표값은 장가계에서 상식현성까지 20원, 상식현성에서 홍가관까지 5원이였다. 1930년대 로혁명근거지였던 상식현은 비록 홍색관광집산지였지만 눈에 띄는 발전을 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운 감이 들었다. 9시에 떠났지만 홍가관향에 도착하니 11시가 다 되였다.

하룡교.

당지에서 나는 귤 몇알과 가방에 있던 과자 몇쪼각으로 점심을 에때웠다. 하룡원수가 어릴때 건너다녔다는 옥천하에 가로놓인 하룡교를 건너 담장으로 둘러쌓인 하룡생가 울안에 들어가니 정면에 목조기와건물로 된 생가가 나타났다. 생가 현관중앙에는 하룡원수의 흉상이 모셔져있고 등소평의 제사로 된 “하룡옛집(贺龙故居)”이란 간판이 처마에 걸려있었다.

하룡생가를 돌아보고 우리는 하룡생가 맞은켠에 위치한 하룡기념관을 참관했다. 기념관광장은 하룡동상광장이라고 명명했는데 마침 “12.9”애국운동기념일이라 공청단장가계시위에서 기념활동을 하고있었다. 건축면적이 2080평방메터인 하룡기념관은 “식칼을 들고 혁명하다”, “남창기의”, “혁명근거지 창건”, “항일전쟁”, “해방전쟁”, “국가체육사업의 정초자”, “중국인민해방군 중요한 령도자”, “영원히 인민들의 마음속에” 등 8개 전시청으로 되였는데 부동한 력사시기 하룡의 사진 337점, 문물문헌 138점과 임필시, 관향응 등 동지들의 력사사진 387점과 문헌문물 190점이 전시되였다.

1953년 조선을 방문한 하룡원수가 김일성주석과 함께 담소하고있다

당지 방언이 약간 섞인 안내원의 해설을 듣다 말고 내가 발은 멈춘 곳은 하룡원수가 1953년 10월 21일, 중국외교방문단을 인솔하여 조선을 방문하던 사진앞에서였다. 친절하게 담화를 나누면서 소탈하게 웃는 하룡원수와 조선의 김일성주석의 사진을 이곳에서 보니 더욱 감개가 무량했다. 또 다른 사진은 1952년 5월 4일, 서남구 제1기 인민체육운동대회에 출석하여 축구시구를 하는 사진이였다. 그해 11월 15일에 제1임 중앙인민정부 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된 하룡원수는 “국가축구팀은 연변팀의 완강한 정신력을 따라배우고 연변팀은 국가팀의 기술을 따라배우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였다. 당시 연변팀의 많은 선수들이 하룡원수의 접견을 받았고 어떤 선수의 별호는 하룡원수가 지어준것(리광수를 중형땅크라고 부른것 등)이라고 하니 발걸음을 쉬이 옮길수가 없었다. 위인의 고향에서 위인의 위용을 우러르고 조선족과 관련된 옛일을 돌이키노라니 이번 관광이 참으로 의의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우리는 홍2방면군 장정출발지인 류가평에 들려 좀 지체를 하다보니 밤중에야 숙소에 돌아왔다.

장가계렬사릉원내에 세워진 대용시렬사기념탑

이튿날에는 내친김에 력사답사를 한답시고 장가계렬사릉원을 찾았다. 장가계시 동남쪽에 위치한 장가계시렬사릉원은 기실 1986년 10월에 설립한 대용시혁명렬사기념탑을 주건물로 한 릉원이였다. 1994년에 장가계시가 설치되다보니 기념탑에는 아직도 대용시라는 락관을 사용하고있었다.

험준한 산세를 리용하고 산에 익숙한 당지인들과 국민당 잔여세력이 합세한 상서토비는 해방군에 완강하게 대항하였고 숙청은 매우 간고한 전투들로 이어졌다. 당시 상서토비숙청에 투입된 부대는 동북에서 간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 제139사와 제141사였는데 그 산하의 417, 418, 422, 423퇀이 직접 토비숙청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장가계시박물관에서 본 작전지도에는 141사는 표기되였는데 422, 423퇀은 없고 417퇀과 418퇀만 표기되여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속에는 필경 수백명의 조선족전사들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2013년에 새로 조성된 무명렬사묘비

렬사릉원 입구에서 렬사탑까지는 100여개의 가파로운 층계를 올라가야 되는데 바로 릉원입구 오른쪽켠에 “대용에서 희생된 외현 및 대용 주소 불명 렬사명록”이 있었다. 그 명록에서 제423퇀의 정연업, 리홍비 등 길림적 렬사들의 이름을 읽을수 있었고 그들은 423퇀이 항미원조에 나가기전인 1950년 4월과 7월에 각각 희생되였음을 알수 있었다.

기실 이곳에 묻혀있는 렬사들은 상서토비숙청에서 희생된 전부의 렬사들이 아니고 대용시경내에서 희생된 렬사들일뿐이다. 장가계에서 100여킬로메터 떨어진 룡산현경내의 팔면산토비숙청전투에서 1000여명 토지를 소멸한 422퇀은 유명한 조선족퇀이다. 장가계지역을 비롯한 상서투쟈족묘족자치주 등 지역에서 희생된 조선족렬사가 어찌 수십명에 그치랴!

길림성출신인 423퇀 전사 정수업렬사의 묘역

나는 중국의 해방사업을 위해 머나먼 타향에서 뜨거운 피와 생명을 바친 조선족렬사들의 명복을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처음으로 밟아보는 장가계의 산하(山河)에 연변의 산하처럼 우리 조선족렬사들을 비롯한 수천수만의 렬사가 잠들어있다는 사실에 또 가는 곳마다 볼수 있는 렬사비들에 저도 모르게 장가계의 땅이 사랑스럽기까지 하였다. 고향과 수천리 떨어진 타향에서 이름도 성도 모르는 다른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붉은 피를 흘린 그들의 불멸의 업적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가렬처절한 항일전쟁과 중국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로전사들이며 투사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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