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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답사]눈에 덮인 내두산을 가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02 16:24:25 ] 클릭: [ ]

《내두산항일밀영》을 찾아

1935년 겨울 내두산근거지 보위전이 벌어졌던 왕덕산.

31일 아침 8시, 장백산아래 첫 동네로 불리우는 내두산촌을 향해 우리는 연길을 출발했다. 내두산촌 촌가를 작사하고 내두산관광촌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있는 작가 김춘택씨의 가이드를 받으며 떠난 답사길이였다.

우리 일행은 202성도를 따라 룡정시와 화룡시를 경유, 눈에 덮인 선봉령을 넘어 안도현 경내에 들어섰다. 안도현경내에서 바라본 삼도림장은 온통 무송으로 뒤덮인 은빛 백색세계였다.

눈에 덮인 선봉령.

은빛세계로 변한 삼도림장의 모습.

송강진에서 203성도에 들어선 우리는 약 한시간을 달려 이도백하진에 도착하였다. 미인송이 반겨맞는듯 찬바람에 오연한 자태를 뽐내는듯 싶더니 새로 들어선 장백산관리위원회 각 부처의 현대식 건물들에 눈앞이 환해졌다. 그중에서도 항공모함 모양으로 건설한 고급건물이 가장 눈에 뜨인다. 멀리서 바라보았지만 5억원을 투자해 건설했다는 건물은 연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고급스런 건물이였다.

이도백하진에 들어선 항공모함 모양의 고급청사.

이도백하진 동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한 내두산촌은 장백산아래 첫동네로 널리 알려진 유서깊은 조선족마을이며 1930년대 항일련군이 활동한 항일유격근거지로 2007년에 길림성인민정부로부터 성급문물보호단위로 된 력사가 유구한 홍색관광지이다. 장백산으로 가는 길 13km 지점을 지나 400m쯤 더 달리면 왼손켠으로 내두산관광구 입구가 바라보인다. 그길로 접어들어 한참 달리면 새로 건설하는 장백산관리위원회 당교건물이 나타나고 좀 지나면 내두산경마장이 나타난다.

내두산은 500여메터를 상거하여 마주 바라보는 두개의 그닥 높지 않은 산봉우리인데 내두산촌은 거기에서 동남쪽으로 9km를 더 들어가야 했다. 세멘트도로였지만 겨울에는 쌓인 눈이 녹지 않아 아차 실수하면 길옆 웅덩이에 빠질 위험이 웅크리고 있어 운전기사는 각별히 조심해서 차를 운전한다.

내두산촌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는 겨우내 눈이 녹지 않는다.

내두산촌 주위는 울창한 망망림해이고 남쪽으로 장백산천지와 35km 상거, 맑은 날이면 왕덕산이나 내두산에 올라 멀리 장백산폭포가 바라보인다고 한다.

마을을 가로 지나는 삼도백하는 내두산촌동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백리 원시림을 유유히 지나 이도강에 흘러든다. 조선력사고찰단이 1959년도에 이 마을을 다녀간뒤 연변문물고찰대, 연변문물조사대 등 각급문물부문과 당사연구인원들이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해 여러차례 조사를 진행하였다. 아울러 1984년 제2차 전국문물조사 때 근거지에 대해 재조사와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2007년에는 길림성인민정부에서 제6패로 성급문문보호단위로 공포하였다.

길림성문물관리국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의 소개에 의하면 근거지의 범위는 동서로 약 400m이고 남북으로 약 300m이며 주요유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부유지, 초소유지, 근거지보위전유지 등인데 군부유지에는 제2군 제2퇀 퇀부, 내두촌농민위원회, 아동단실, 부녀회,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 등이다. 초소유지는 왕덕산(왕덕태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지는 산) 세번째 봉우리에 있으며 타원형으로 움푹 패인 구덩이다. 항일련군밀영은 동서로 3.7m, 남북으로 2.7m로 되였으며 근거지보위전유적지는 내두산촌 서북쪽, 왕덕산동북쪽 언덕에 위치하여 있다. 근거지에서 당시 군민들이 사용한적이 있는 자기그릇과 쇠가마 등 생활용품이 발견되였다.

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항일투쟁 형세의 수요에 따라 동만특위, 2군 군부를 처창즈근거지에서 철수하여 두길로 나누어 남만과 북만을 향해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해 겨울 군장 왕덕태(1907.5.23-1936.11.25)는 주력부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이도백하 동남쪽 산속에 들어가 내두산촌을 중심으로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1935년 11월 왕덕태는 내두산근거지보위전을 지휘하여 적은 병력으로 우세한 적을 타승한 전과를 취득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병력은 자위단까지 800여명에 달했으나 근거지에는 2개 련의 병력과 군부기관, 일부 녀전사와 부상병이 전부였다. 첫째날과 두번째날에 일본군은 우세한 병력과 무기를 믿고 분별없이 공격을 해왔으나 우세한 지형을 차지한 혁명군의 완강한 저격에 막혀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였다. 혁명군도 군부기관의 동지들과 부상병들까지 보위전에 용약 뛰여들었다. 세번째 날부터 왕덕태는 지형에 익숙한 당지군중들의 방조하에 여러개 소대를 파견하여 적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하여 적군의 유생력량을 소멸하고 전투의지를 상실시켰다. 이곳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두차례의 보위전을 전개하여 적군 300여명을 격사하였다.

1959년 조선력사고찰단이 세운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2007년도에 안도현인민정부에서 세운 《내두산항일밀영》기념비.

내두산촌 입구에 들어서면 눈에 덮인 길 왼쪽언덕 마른 풀숲 사이로 3개의 기념비가 눈에 뜨인다. 첫 번째와 두번째 기념비는 1959년도에 조선력사고찰단이 세웠다는 기념비인데 오랜 세월속에 글씨가 산화되여 읽기가 힘들었고 세번째 기념비는 2007년도에 안도현인민정부에서 세운 《내두산항일밀영》기념비였다. 기념비의 앞면에는 《길림성문화유물보호단위 내두산항일밀영 길림성인민정부 2007년 5월 31일 공포 안도현인민정부 세움》이라는 붉은 글이 조한문으로 새겨져있었고 뒷면에는 《내두산항일밀영(1935년 겨울부터 1936년 3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부, 제2련대 본부, 내두촌농민위원회,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 등이 포함되여 있다. 군장 왕덕태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거느리고 내두산항일밀영을 창립함과 동시에 각종 형식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인민군중의 지지하에 유격전을 적극적으로 벌려 적들에게 심중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밀영주위 20메터 이내는 중점보호구역이다.》라는 글이 조한문,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동만항일투쟁사에서 제일 마지막 항일유격근거지로서 그 력사적의의가 크다. 그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상급의 정신에 의하여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되였고 수백여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항일 최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내두산에서 동북인민혁명군에 의해 심중한 타격을 입은 일본침략자들은 실패를 달가와 하지 않고 대규모의 집단이주정책을 실시하여 내두산촌에 수백호가 살수 있는 집단부락(1938년경)을 세우고 백여명의 자위단을 파견하여 항일련군을 견제한다. 하지만 당시 자위단 단장이나 부단장들은 모두 조선족이였고 항일련군과는 한번도 총싸움을 한적이 없다고 한다.

내두산의 아침이 밝아 온다.

농가의 창고로 쓰이는 귀틀막집에 항일밀영의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그처럼 큰 마을이였지만 무상한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현재 이 마을에는 40여호의 가구가 모여 살고있었다. 그것도 본마을에서 7리가량 떨어진 3대는 전부가 한족들이 들어와 땅을 도급맡고 있을 정도로 한족들의 발길이 장백산아래 첫 조선족동네를 향해 한발자국한발자국 다가 들고 있는 정황이다.  

겨울철이라 유격근거지의 유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또 마을 사람들도 일부 유적에 대해서는 정확한 위치에 이견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자세한 답사는 눈이 녹고 새싹이 움트는 4월경에 하기로 약속하고 이튿날 아침 남북으로 안도현을 횡단하는 장거리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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