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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09] 닭알에 깃든 구구 사연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1-02 11:29:50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7)

▩박철원(연길)

필자 부부

지난날 없어서 못 먹던 세월이 지금은 싫어서 안 먹는 때가 되였다. 아빠트에 살면서 입쌀이며 밀가루를 마음대로 살 수 있고 고기며 해산물, 닭알, 우유, 과일이 풍성한 세월이다. 먹을 근심 없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계획경제에 시달려 굶주리다 시장경제 시대를 만나 여유족족 행복을 누린다. 이 모든 것이 개혁개방의 덕이라 하겠다.

8월의 삼복 무더위를 이기며 어느 일요일 나는 안해와 함께 모아산 등산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섰다.

“시원히 국수나 먹읍시다.”

자기는 썩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즐기는 걸 아는지라 안해는 랭면옥으로 걸었다. 11시도 안되였는데 하남 민족식당 랭면부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붐비였다.

잠간 자리를 기다리는 기간 나의 목젖은 벌써 방아를 찧었다. 드디여 자리가 생겨나 우리에게도 국수 두그릇이 올랐다. 저가락을 집어든 안해는 닭알을 집으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였다. 자기 몫의 닭알을 잡숴달라는 것이다. 미안해하는 그 눈길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담낭이 나쁘기에 닭알을 못 먹는다는 것이다. 처음이 아닌 동작이기에 나는 그저 웃음으로 끄덕였다.

옛날에는 메밀국수가 많았는데 메밀은 껍질부터 송곳 같은 뾰족날이 많이 서서 그 가루가 아무리 미세한 분말이라 해도 현미경으로 본다면 역시 가시가 많이 돋은 과립체 형태라고 한다. 그래서 배속에 들어가면 점막을 ‘찌르는’ 자극이 있기에 옛날 선조들로부터 메밀국수를 먹을 때에 꼭 먼저 닭알을 먹어 위점막을 포장해주라는 의미란다.

그러고 보니 국수에 닭알은 궁합 음식이기에 랭면을 먹으며 닭알을 먹지 않는 것도 틀린 습관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적지 않은 식객들이 삶은 닭알을 먹기 싫어 남겨버린다. 랭면옥에 물어보니 반수 이상의 손님들이 닭알을 버린다는 것이다. 여름철 더운 날이면 랭면 2000여그릇씩 판다니 천여개의 닭알이 구정물에 들어가는 셈이다. 너무나도 아깝고 끔찍한 랑비다.

닭알에는 풍부한 단백질과 칼슘, 린, 철, 칼륨, 비타민 등이 함유되여있어 완전식품이라고도 불린다. 필수 콜레스테롤, 아미노산과 메사이오닌, 시오틴 같은 합황 아미노산이 많아 100그람당 139칼로리 정도의 열량을 가지고 있기에 인체 면역력 제고와 체질 증강에 보귀한 음식물이다. 또한 손재간 없는 사람도 쉽게 맛나는 료리를 만들 수 있는 흔하고 친근한 식품이다. 이토록 질 좋은 식품이건만 ‘루명’도 많이 쓰며 외면당하는 때가 많아 가슴이 아프다.

나는 안해가 싫어하는 닭알을 먹을 때마다 닭알이 귀하여 가슴 앓던 때의 일이 떠오르군 한다.

1974년 1월, 우리의 첫 애기 림산 때의 일이다. 그 때 안해는 동불사의 본가집에서 호주노릇하며 출근하고 나는 돈화시에서 사업하는 외기러기였다.

조선족은 해산하면 미역국이 우선이지만 한족들은 닭알이 우선이고 닭알을 많이 먹은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다. 하여 나도 그 때가 되면 안해에게 닭알을 마음껏 먹여보리라 은근히 작심했다. 그런데 정작 닥치고 보니 안해의 림산기가 바로 음력설 좌우인 엄동설한이여서 닭알이 그렇게 귀할 줄이야.

그 때 돈화시에는 량식창고에 자그마한 양계장이 있었다. 그래서 량식국에서 일하는 한족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며칠 후 량식창고 주임의 도장이 찍힌 ‘두근’이라고 쓴 쪽지를 가져다주는 것이였다. 비록 너무 적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보배 같았다.

가격은 한근에 겨우 70전, 나는 새알보다 좀더 커보이는 하얗고 맑은 닭알 22개를 사들고 왔다. 여러개는 껍질에 피자욱도 있었다. 숙소에 들고 와 안전한 그릇에 담으면서 보니 한놈은 살짝 금이 갔었다. 나는 종이에 풀을 발라 터진 닭알을 땜질하여 맨 우에 올려놓았다.

상업국 식료품공사에도 찾아가 사정해보았는데 닭알은 ‘특수공급’으로만 비준한다며 퇴를 맞았다.

며칠 후 연길 출장길에 적지만‘최다'의 닭알 22개를 대감 모시듯 조심스레 들고 와 장모님에게 바쳤다. 그 날이 해산날 10일 전이였다.

그런데 사위가 왔는데 반찬거리가 없다며 장모는 그 자리에서 닭알 두알을 깨여 나에게 닭알국을 끓여주는 것이였다. 산모를 먹이려고 쉽지 않게 얻어 조심스레 들고 온 것을 나더러 먹으라 하니 너무도 난처하였다. 먹기도 어렵고 먹지 않을 수도 없고. 만삭이 된 안해도 옆에 앉아 웃으며 권장하던 그 때의 정경이 지금도 가슴에 아련하게 찔려온다. 후에 알고 보니 그 때 여덟살이던 막둥이 처남이 너무 보채여 장모님은 역시 그 닭알 두알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우리의 첫 애가 태여나는 날 장모는 닭알을 산모에게 먹이며 힘을 주었다. 얻기 힘든 닭알 덕분인지 닭알 18개를 대접받은 산모는 무난히 고비를 넘기였고 젖도 많이 돌아져 아이도 건강했다.

그토록 희귀하던 닭알 얻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1년 후 딸애의 돌을 쇠고 우리는 드디여 돈화시에 단란한 새 가정을 꾸리게 되였다. 장모는 병아리 몇마리 사주었다. 그 후로부터 우리 집에도 암탉이 있어 닭알을 생산할 수 있게 되였다. 아이들의 입살이에는 충족하였다. 혹시 불시에 술손님이 찾아와도 너무 막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직 개체경제가 허용되지 않아 농촌에서는 해마다 닭알 판매 임무를 떨구고 공소사에서 수매하였다. 돈이 나올 데 없는 농민들은 닭을 은행(鸡屁股银行)이라 불렀다. 그제날에 학용품을 사려면 닭알을 들고 공소사에 갔고 할아버지들이 정통편을 사도 닭알로 바꾸었다.

소학교 시절 학교에서 원족 가는 날에는 꼭 차례지던 삶은 닭알, 그렇게도 맛있을 수가 있을가!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60년대, 우리 집에서는 닭 몇마리 길렀다. 엄마는 작은 그릇에 닭알을 깨여서는 소금물을 넣고 잘 저은 후 밥가마에 쪄내여 아버지의 도시락 반찬으로 하군 하였다. 어떤 날에는 찐 닭알을 떠내 도시락에 담아보내고는 아직 닭알이 좀씩 붙어있는 그릇을 나에게 장려하군 하였다. 나는 그 ‘밥도적’을 그릇에 숟가락 자리가 나도록 긁어먹었는데 그 별미의 짭짜름한 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몆해 전 나 절로 그 때의 엄마를 본따 닭알반찬을 만들어보았는데 소금냄새 뿐 아무 맛도 없었다. 닭알맛이 변했는지, 아니면 내 입이 변했는지…

내가 알건 대로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실 때에 “닭알은 녀자들이 먹는 것이 아니야.” 하며 닭알반찬에 저가락도 안 대더니 어머니 역시 그 습관이였고 녀동생에게도 차례지지 않다 보니 지금도 나의 녀동생은 닭알은 “비린내 나서 싫다”며 먹을 줄 모른다. 나도 닭알은 아버지들만 많이 잡숫고 남자애들이나 조금씩 맛보는 줄로 알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닭알은 여전히 우리들 식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주객이다 보니 여러가지 품질의 닭알이 대량 생산되는 한편 인조닭알도 나오고 지어 가짜닭알도 나오는 현실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닭알맛도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닭알은 여전히 고급 식품으로 대우받아야 함이 틀림없을듯하다.

닭알은 옛날에도 지금에도 장래에도 사과와 함께 제사상 잔치상에 빠질 수 없는 흔하면서도 귀한 식품이다. 다만 남성들에게 영양보충으로만 쓰이던 닭알이 아니고 애들을 어르기만 하던 반찬이 아니다.

없어서 못 먹던 그 세월이 오늘은 싫어서 먹지 않는 시대로 되였건만 오늘도 나는 해산할 안해에게 닭알을 푸짐히 대접 못한 죄책감에 모대긴다. 닭알만 보면 떠오르는 아픈 추억이다.

나는 지금도 외출하면 아침식사 때 꼭 튀긴 닭알 한알씩 먹으며 그 옛날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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