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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05]‘7자나무’와 어머니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0-16 12:47:57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3)

▩김삼철(룡정)

2001년 9월, 손자와 같이 ‘7자나무’ 앞에서.

내 나이 80이 다된 지금에도 ‘7자나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연길시장에 쌀 팔러 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오후에는 돌아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영화의 화면처럼 내 눈앞에 안겨온다.

그 때 우리 집은 연길현 태양구 중흥촌 7대(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 중평촌 7대)에서 살았다. 마을 동쪽에는 연길에서 삼도만으로 통하는 공로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2리 잘되는 공로 옆 광석촌과 중흥촌 경계에 성인의 한아름 거의 되는 비술나무 고목이 한그루 있었다. 그 나무가 7자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 ‘7자나무’라 부르고 있다. 현재 ‘년세’가 200세를 월씬 넘겼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길옆 웅뎅이에 서있는 ‘7자나무’에는 숱한 붉은 천들이 얼기설기 감싸여 지방의 보물로 모셔지고 있다. 두세기를 살아오는 이 ‘7자나무’는 험난한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으며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세세대대로 뜻 깊은 추억을 남기고 있다.

동년시절의 우리 가정은 생활이 너무도 가난하고 처절하였다. 내가 일곱살에 중병에 걸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우리 가정은 어머니 한몸으로 늙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3형제 아들을 거느리였다. 아버지가 사망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벌써 70을 바라보는 년세였고 큰형님이 10여살로 모두 코흘리개 아이들이였다.

농사군 가정인 우리 집은 유일한 일군이였던 연약한 어머니가 밭갈이로부터 파종, 가을걷이에 이르기까지 남의 집 소차를 빌어쓰며 해방을 받아 분배받은 한쌍 남짓한 벼농사를 매일 새벽 별을 이고 나가서는 달을 이고 돌아오며 힘들게 지어왔다. 농사군 남정네들도 하기 힘든 논갈이를 30대의 어머니가 하였으니 그 고생이야말로 하늘땅이 맞붙을 지경이였다. 그래도 다행히 농사는 고마운 이웃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괜찮게 지어왔다.

농사의 모든 환절이 모두 바빴으나 그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겨우내 지어놓은 벼농사를 처리하는 것이였다. 1950년 좌우 우리 나라는 호도거리 농사를 지었는데 국가의 공구량 임무를 완성한 나머지 벼는 모두 쌀로 찧어 연길시장에 가서 팔아 돈을 만들어 가정의 일상 생활용품들을 샀다. 당시 태양구에는 농부산품 교역시장이 없어 중흥촌 일대의 농민들은 모두 연길시장으로 쌀 팔러 다녔다. 연길시장은 우리 마을에서 30리 상거한 곳이다.

소수레가 있는 집들에서는 량식 등 농부산품을 수레에 싣고 사람까지 앉아서 쉽게 다녔지만 소수레가 없는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50~60근 되는 입쌀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리 길을 걸어서 연길시장에 팔러 갔다. 아마도 1년에 10여차는 잘되였을 것이다. 그 때마다 나는 어린 섬약한 힘으로나마 어머니를 도와나섰다.

1948년 여름에 있은 일이다. 아침 일찍 나는 제딴에는 남자라고 10여근 되는 쌀을 등에 메고 앞장에 나섰다. 어머니는 “너는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듣지 않고 ‘7자 나무’ 있는 데까지만 메고 가겠다고 하면서 어머니 앞서 걸었다. 그런데 웬걸 헐치 않았다. ‘7자나무’는 2리 나마 되는 곳에 있는데 2리도 채 오기 전에 10여근 쌀이 천근 무게로 지지누르며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땀을 흘리며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여 ‘7자나무’ 있는 곳에까지 메고 갔다. ‘7자나무’ 밑에서 어머니는 땀벌창이 되여 헐떡거리는 나의 등에서 쌀짐을 내리워 어머니 쌀짐과 합하였다. 그리곤 어머니는 그 무거운 쌀짐을 이고 지고 종주먹을 쥐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어머니의 뒤모습을 지켜만 보며 더는 도와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스러워 말 못할 울분과 설음에 북받쳐 저도 모르게 ‘7자나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7자나무’에 굳어져있는 나를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손짓하였다. 잠자코 있던 ‘7자나무’도 어서 어머니 말씀을 들으라는듯이 고개를 흔들흔들했다.

오후 2시 쯤 되여 나는 또 ‘7자나무’까지 어머니 마중을 갔다. 어머니 오는 양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아예 ‘7자나무’ 우에 올라가 가로타고 앉았다. 마치 키 큰 아버지의 목마를 탄 것 같았다. ‘7자나무’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더없이 초조하고 애절하였다. 이윽하여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량손에 깁고 기운 새하얀 헌 코고무신을 한짝씩 거머쥐고 맨발바람으로 맥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집들에서는 언녕 버렸을 헌 코고무신도 어머니는 아까와서 신지 않은 것이였다.

나는 그 높은 7자나무에서 단숨에 뛰여내려 “어머니!” 하고 소리치며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기특했던지 빙그레 웃으시며 나의 어깨를 살며시 도닥여주셨다. 그리곤 인차 치마말기에 감쌌던 개눈깔사탕 두알을 꺼내여 한알은 내 입에 넣어주고 한알은 내 손에 쥐여주었다. 달디단 사탕물이 나의 목구멍을 적실 때 초들초들 말라터진 어머니의 입술에는 피빛이 력력했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오늘도 또 그 몇푼 안되는 돈을 아끼시느라 점심도 사잡숫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재빨리 개눈깔사탕 한알을 어머니 입에 넣어드렸다. 어머니는 “너 먹으라 준 건데…” 하면서 입안에 사탕을 다시 꺼내려 하였다. 나는 날랜 솜씨로 어머니 입을 꼭 막고 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눈물을 흘리시며 “너도 인제 헴이 다 들었구나?” 하시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나도 뜨거운 그 무엇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감촉하였다. 눈물이 확 솟구쳤다.

‘7자나무’ 밑에서 어머니와 나는 개눈깔사탕 한알씩 녹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불시로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몰켜오더니 천둥이 울부짖으며 심술궂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나와 어머니는 재빨리 ‘7자나무’에 붙어서서 빈 쌀자루를 하나씩 뒤집어썼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나를 감싸안으며 쏟아지는 비를 막았다. 억수로 내리는 비였지만 다행히도 ‘7자나무’의 덕택에 우리는 물참봉은 면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베적삼은 다 젖었다. 좀 있더니 하늘은 내가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듯이 쾌청한 날씨에 불볕을 쏟기 시작하였다. 비에 젖어붙은 6승 베천 너머로 어머니의 여윈 등곬이 가날프게 보였다. 37세에 청상과부로 된 나의 어머니는 가정을 위하여, 세 자식을 위해 재가의 좋은 기회도 모두 뿌리치고 자기 한몸을 희생한 것이였다.

나는 여덟살 되는 그 해에 어머니를 도와 봄부터 가을까지 10여차 쌀을 메고 ‘7자나무’ 있는 곳까지 메여다 주고 오후엔 또 어머니 마중을 다녔다. 아홉살부터는 소학교공부를 거쳐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더는 이전과 같이 어머니와 동행할 수 없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서는 어머니와의 조용한 만남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여덟살 되는 해에 어머니를 도와 쌀짐을 메고 ‘7자나무’ 있는 곳까지 동행했던 그 나날들은 내가 세상을 알기 시작해서 어머니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였으며 내가 인생의 참맛을 알고 인생의 철리를 배운 보귀한 기회였으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머니에게 효도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 나날들은 내가 인생의 아리랑 열두고개를 걷기 시작한 좋은 기회였으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의 첫 인간수업이였으며 내가 일찍 헴이 들어 오늘까지 사람답게 살아올 수 있도록 한 어머니의 가르침이였다. 그래서 나는 1948년 그 1년간의 어머니와의 동행을 돈 주고 살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보귀한 나날들이였다고 생각한다. 그 나날들을 통해 나는 행복의 진가를 똑똑히 알았고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터득하게 되였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우리 세 아들은 모두 출세하여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되였다.

나는 최근년간에 ‘7자나무’가 그리울 때면 손자녀석을 데리고 7자나무를 찾아 사진을 찍고 온다. 그런데 ‘7자나무’도 인제는 늙었는가 본다. 름름하던 당년의 몸매는 몇아름 되는 뚱뚱한 고목으로 되였고 구부정한 허리와 꺼칠꺼칠한 껍질에 메마른 가지들만 늘어가고 있다. 그제날 여덟살 코흘리개 남자애가 지금 80고개에 오르고 있으니깐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70년 전에 어머니가 연길시장에 쌀 팔러 갔다가 눅거리 국밥도 사잡숫지 않고 아껴서 사온 그 개눈깔사탕 맛은 지금도 내 입에서 감돌고 있다. 그 사탕 두알은 잘사는 집들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감로수로 되여 내 인생에 흘러들며 나를 바르게 성장시켜주었다. 그 사탕에서 나는 어머니의 참사랑을 느꼈고 삶의 진가를 알았으며 어려운 인생사를 알기 시작하였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추억의 돛배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싣고 무정한 세월의 흐름 속에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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