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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89]장모님의 사위사랑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22 13:49:49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7)

▩리경호(연길)

필자 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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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가 있는 남자면 모두 장모님이 있겠지만 사위와 장모님의 사이가 어떠한지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장모님의 사위사랑은 흔하지 않은 사랑이였다. 장모님이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여오니 생전에 장모님의 사위사랑이 보다 가슴 뜨거이 안겨진다.

장모님은 원주최씨 가문의 맏딸로 태여났는데 우로는 오빠 한분, 아래로는 녀동생 한분이 계셨다. 장모님은 1934년생으로서 태여나서 11년 후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였다. 연길시2중을 다닌 장모님은 녀자이면서도 반에서 반장을 할 만큼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딸 넷, 아들 하나인 경주김씨 가문에 시집을 와서 지극한 정성으로 시아버님을 94세까지 모시면서 친척들의 인정을 받았다. 슬하에 아들 둘, 딸 둘을 두셨는데 자녀 네명을 모두 대학공부를 시켰고 자녀들은 사회 각계에서 맡은 바 사업을 잘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어머니였다.

나는 장모님을 11년간 모셨고 보기 드물게 장모님과의 사이가 좋아서 주변의 친척 친우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장모님의 특별한 사위사랑으로 인하여 비롯되였다고 인정한다.

2

나는 198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연길에 출근하게 되였다. 집이 외지여서 연길로 출근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날마다 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나를 보고 아직 외지 대학에서 재학중인 안해는 장모님과 상의하고 나를 자기 집에서 출근하라고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지어는 말떼기도 하지 않았는데 가시집에서 출근하라니… 말도 안될 소리였다. 하지만 별로 뾰족한 수가 없어서 나는 수긍하게 되였고 결혼도 하기 전에 1년 가까이 가시집 신세를 지게 되였다.

역시 사위에게는 장모님이였다. 장모님의 준사위에 대한 대우는 정말로 난생처음 받아보는 높은 대접이였다. 가시집에서 출근하는 동안 나는 한번도 묵은밥을 먹은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내가 밥상에 앉을 때에야 밥솥을 열고 갓 지어진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새하얀 이밥을 떠놓았다.

그외에도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거위알이였는데 때마다 삶은 거위알 하나가 오르는 것이 가관이다. 거위알 하나의 크기는 아마 닭알의 세배 쯤 되지 않을가 생각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끼니마다 오르군 하였다. 정말 장모님의 사위사랑은 극진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내가 몸이 좀 불편했는데 장모님은 나를 위해 어느 도축장에서 얻어왔는지 개를 잡으면서 배안에 있던 해빛도 보지 못한 새끼들을 고아서 연거퍼 나를 먹였다. 사람의 몸을 춰세우는 데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시집에 있다가 결국에는 안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상처남 먼저 내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다. 금방 어머니가 돌아가고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점을 생각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장모님은 자식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아들 둘, 딸 둘을 두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식들의 집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던 장모님이 나의 생일에 닭 한마리를 들고 나타나서 우리 부부는 의아하기도 했고 감동되기도 했다. 금방 결혼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이 허전해있을 나에 대한 배려였으리라.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장모님은 그 날 길수리로 뻐스가 끊기여 인력거를 세내여 울퉁불퉁한 공사장길에 짐들을 챙겨들고 덜커덩거리며 힘겹게 오셨던 것이다.

필자의 장모님 최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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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은 보기 드물게 매사에 긍정적이다. 웬 영문인지 터밭의 채소들을 시장에 갖고 나가 팔면 남들이 어쩔 사이 없이 다 팔아버리고 동네에서도 전혀 남들의 말밥에 오르지 않는다. 장모님은 늘 자신이 남의 말밥에 오르지 않게끔 처신하는 데 습관되여있었다. 남들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는다. 항상 남의 우점만 생각하고 누군가 어느 사람이 어찌어찌하다고 뒤소리를 렬거하면 장모님은 그 사람이 그 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말씀하신다.

장인어른이 세상을 뜨고 나서 장모님은 자식들이 모시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혼자서 집을 지키셨는데 우리 집에 오게 된 계기는 바로 눈병이다. 웬 일인지 눈이 불편하다고 해서 병원에 모셔가겠다면서 우리 집에 모셔왔고 또 치료에 시일이 걸린다면서 그대로 머문 것이 우리 집이였다. 그것이 2006년인데 그렇게 나와 장모님은 또 한집에서 살게 되였다.

장모님은 불행하게도 우리 집에 온 이듬해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하여 그 뒤로는 오직 화장실 출입만 할 수 있었고 주방일을 포함한 다른 일들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괄목하게 한 것은 시력을 다 상실할 때까지도 시력이 회복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이였다. 버릇처럼 “이제 좀 나아지오. 좀 있다 다 회복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5, 6년이 지나도록 자기가 눈이 회복되여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장모님이 왜서 이토록 자식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가를 알아냈다. 장모님은 절대 보이는 현실을 말하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바를 현실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손자가 공부를 안한다면 장모님은 꼭 “얘는 공부로 성공할 아이요. 이제 두고 보오.”라고 말씀하신다. 안해가 나에 대한 불만이 터지면 장모님은 언제나 사위를 감싸고 사위 편에 선다. 사위 립장에서 보면 사위 말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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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방송에 나가는 일이 잦았다. 주와 시 방송국의 생방송에 자주 나갔는데 그 때는 장모님에게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시간이다. 앞을 보지 못하니 방송을 들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다른 재밌는 종목을 청취하다가도 사위의 생방송 시간이 되면 무조건 바꾸어 사위의 생방송을 듣는다. 그러다 저녁에 퇴근하면 나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듯 싶다. 문고리를 당기는 순간부터 장모님과 안해가 열렬한 박수로 맞이해주는 것이다.

“어쩜 아나운서처럼 말을 잘하오!”

“사위 말에는 그른 데 없소.”

“하늘아래 우리 사위 같은 사람이 없소.”

말버릇이 된 장모님은 늘 이렇게 많이 부족한 사위를 춰세웠다.

2017년 6월 27일, 장모님은 우리 집에서 자식들에게 에워싸여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종래로 사람이 생을 이렇게 예쁘게 마감할 수 있는지 본 적이 없다. 꼭 다시 깨여날 것처럼 그렇게 편안히 운명하신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는 “하늘아래 우리 사위 같은 사람이 없소.”라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였다. 장모님이 별세하신 지 1년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장모님의 사랑에 목메여 이렇게 글로나마 적어보면서 그리운 마음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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