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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87]나의 동창생 춘애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06 15:03:04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5)

▩김숙자(길림)

소녀시절 친구들과 함께 남긴 사진. 뒤줄 중간 사람 춘애, 그 오른쪽이 필자.

춘애와 나는 초중동창생이다. 녀성의 온갖 아름다움을 한몸에 다 가진듯한 그는 고운 눈에 복스런 보조개에 얼굴형도 길지도 동그랗지도 않고 딱 보기 좋게 갸름한 데다 키까지 1메터 70이나 되여 거리에 나서면 누구나 다시 뒤돌아보는 전형적인 미인이다.

우리는 공사마을에 있는 중학교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춘애는 가정환경도 좋았다. 아버지는 군인출신이셨는데 제대한 후 공사에서 민정사업을 하고 계셨다. 체구가 건장하신 그의 아버지는 이목구비가 이를 데 없이 준수하셨는데 ‘8.1영화촬영소’에서 배우로 데려간다고 했다는 소문까지 날 정도였다.

춘애는 또 언니도 있고 오빠도 둘이나 있었다. 우리는 그 애네 오빠 소식에 많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큰오빠는 부대에 있다가 제대한 후 문화혁명 후 대학입시가 회복되자 첫해에 합격을 하여 대학생이 되였고 둘째오빠는 연변 스케트가 한창 이름을 날릴 때 스케트선수로 활약하면서 아시아동계스케트운동회에까지 참가한 적이 있었다.

오빠도 언니도 없이 4남매중 맏이인 나는 그런 춘애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의 큰오빠는 후에 문화대혁명 후 연변의 첫 박사연구생으로 《연변일보》에 사적이 보도되기까지 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복단대학의 연구생이였다. 이렇게 춘애네 집은 동네방네 소문난 뜨르르한 집안이였다.

미인 춘애는 그 당시 나팔바지를 입고 거리바닥을 휩쓸던 남자애들이 너도나도 침을 흘렸지만 아버지가 엄하신 데다가 주먹이 든든한 둘째오빠가 울바자를 치고 있었기에 누구도 감히 그 집 주위에 언뜰거리지도 못했다. 나 또래 녀자애들 마음속의 우상인 둘째오빠가 집에 올 쯤 되면 우리는 춘애한테 가만히 물어본다. “너네 둘째오빠 집에 왔니?” 춘애한테서 왔다는 대답을 받으면 우리는 부끄러워 감히 그의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울바자사이로 둘째오빠 모습을 훔쳐보군 했다.

춘애는 숙제가 있을 때마다 저녁에는 끈을 궁둥이까지 길게 드리운 책가방을 메고는 우리 집으로 왔다. 그리고는 자기 숙제를 아예 나한테 맡겨버렸다. 그나마 공부만은 내가 춘애보다 많이 잘했었다. 하지만 가난한 가정형편에 너무 일찍 눈을 뜨다 보니 늘 기 죽어 못난 새끼오리 같이 땅만 보며 다녔댔는데 서글서글한 성격에 자신만만한 춘애가 찾아오면 내 마음도 많이 의젓해지군 했다. 춘애는 숙제하러 오면서도 길게 궁둥이까지 드리웠던 그 가방 안에서 ‘개눈깔사탕’이랑 ‘닭똥과자’랑 맛있는 먹거리들을 넣어가지고 와서는 아낌없이 우리 형제들한테 나눠주군 했다.

후에 나는 외지에서 고중공부를 하고 그는 초중을 졸업한 후 연변빈관 복무원으로 뽑혀서 연길로 갔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도 계속 련계가 있었지만 지금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줄 어찌 알았으랴.

그 때 우리 집은 여섯식구가 아버지의 엷은 로임에 매달려 빠듯이 살았다. 게다가 엄마까지 장기환자여서 아버지는 달마다 단위의 호조금을 앞당겨 써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봐야 했다.

나는 사범대학에 다녔기에 학교에서 생활보조금이 한달에 18원 50전씩 나와 식사비는 거의 그 돈으로 해결했고 집에서 달마다 20원씩 부쳐줘서 일상생활비용으로 썼다. 그 때 우리 학급에는 집에서 달마다 50원씩이나 보내는 애가 있어서 동창들의 부러움을 얼마나 자아냈는지 모른다. 나는 달마다 아껴먹고 아껴써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도 춘애의 편지를 받게 되였는데 전과 다름 없는 문안편지거니 했더니만 편지 속에 5원짜리 돈 한장이 끼여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그 때 5원이면 꽤나 큰돈이였다. 우리 집 친척들도 모두 어려운 형편이여서 종래로 이렇게 큰돈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였다. 내 기억에 내가 대학교에 붙었다고 한마을에 사는 우리 엄마 사촌언니가 우리 엄마한테 2원을 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춘애는 몇번이나 나에게 부치는 편지 속에 5원씩 끼워보내군 해서 얼마나 나를 감동시켰는지 모른다. 나는 속으로 이후 사업에 참가하면 꼭 그의 은혜를 갚으리라고 속다짐했다. 그러나 생각 뿐이지 내가 먼 길림으로 배치받고 또 그의 집도 연길로 이사가는 바람에 그만 련락이 끊어지게 되였다. 그동안 결혼하고 애를 키우면서 바삐 돌아치다 보니 그와 다시 련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언제나 그의 그림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애도 어느 정도 크고 남편의 사업도 많이 인정을 받으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나는 춘애의 행방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여러모로 연줄을 달아서 찾은 결과 7, 8년 전에 끝내 춘애와 련계가 닿았다.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춘애 목소리에 나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그리웠던 목소리인가! 나는 춘애가 잠간 연길에 있는다는 소식을 듣고 인차 지체 없이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 때는 고속철도가 통하지 않는 때라 쾌속기차를 타도 예닐곱시간이 걸려야 했다. 하지만 춘애와 다시 만난다는 들뜬 마음에 거리가 문제가 아니였다. 어떻게 변했을가. 나처럼 중년아줌마 모습일가 아니면 아직도 예쁜 미녀 모습일가. 춘애 모습을 여러모로 상상하면서 장시간의 달리는 기차에서 힘든 줄을 몰랐다. 드디여 약속지점인 연변예술극장 문앞에서 나는 그만 나의 눈을 의심했다. 거의 변화가 없는 그의 모습에 나는 은근히 시샘이 날 정도였다. 아직도 그 성격 그 모습인 춘애는 나를 반갑게 자기 집에 끌고 가서는 찰찰 넘치는 술잔에 그동안 그립던 정도 듬뿍 채워 끝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춘애는 연길에서 사업하면서 일터도 바꿨는데 일터마다 따르는 총각들이 한개 련이라면 아쉬울 정도이고 심지어 거리에서도 춘애 자전거 핸들을 잡고 가로막고 놓지 않아 애먹을 때도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든든한 둘째오빠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을러메놓기도 하면서 춘애를 지키고 있어 뒤심이 든든했다.

이 몇년간 나는 연길에서 춘애와 몇번 외식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도 춘애를 따른 적이 있다는 남자를 두세명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연길에서 가는 식당마다 너를 따르던 남자를 만날 수 있겠네.” 하고 춘애를 골려준 적도 있다.

어떤 남자가 운수 좋게 미인 춘애의 남편이 되였을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춘애 주위에 울바자를 든든히 막고 있던 둘째오빠가 자기 친구를 데리고 와서 이 남자한테 시집가라 해서 오빠가 시키는 대로 시집갔다 했다. 아들을 두었는데 지금 키가 1메터 80도 훨씬 넘는 멋진 총각이 되였다. 아들과 같이 거리에 나섰다가 아들 친구를 만나면 녀자친구인가 하는 착각을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춘애가 근년에 우연하게 우리 아버지 생신연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내 녀동생도 춘애가 나보다 스무살은 더 젊어보인다 했고 우리 아버지도 “춘애야, 너는 지금도 아시아 미녀선발대회에 참가해도 되겠다.” 하시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훌륭한 딸을 키워내신 그의 부모들을 뵈러 갔었다. 그의 멋진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아주 정정한 모습이였다. 춘애 어머니도 나를 만나더니 무척 반가와하시며 “참 잘 번졌다”며 치하도 아끼지 않으셨고 팔십 고령 할머니 답지 않게 사유도 민첩하고 이야기도 아주 잘하셨다.

이렇게 다시 연줄을 찾은 나는 소녀 적 우상인 멋진 둘째오빠와 지금은 대학교 철학교수인 큰오빠도 만나보았다. 둘째오빠는 지금도 풍채가 름름하고 멋졌는데 연변주 직속 모 기관에서 당위서기로 사업하시였다. 만나보는 순간 내 가슴 속에서는 아직도 소녀시절 둘째오빠를 숭배하며 설레던 마음파도가 다시 술렁임을 느꼈다.

이 몇년간 나는 설명절 때마다 꼭 시간을 타서 춘애 어머니를 만나러 갔었다. 물론 춘애는 국외에 사업이 있어서 설명절 때면 집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의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변함이 없다. 춘애의 따뜻한 마음은 오늘도 핸드폰으로 전해오고 있다. 아침마다 알록달록한 고운 그림 속의 따뜻한 글은 그의 마음처럼 아침부터 나의 가슴을 덥혀준다.

춘애야, 아직도 우리는 아들 장가 보내고 손자손녀 봐주어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 나름 대로의 생활을 즐기고 서로 도와가면서 나머지 인생을 더 멋지게 살자. 백년인생에 우리가 얼마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꼬부랑할매가 되면 어떠랴. 우리 둘의 따뜻한 손을 끝까지 잡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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