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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86]어머님의 자장가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5-30 15:27:39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4)

▩리진욱(연길)

1964년 1월 필자의 결혼식 기념사진(앞줄 모친과 조카)

1940년대 중반 부모님의 사진 

나는 가끔씩 내 허벅지에 자리하고 있는 외투단추 크기의 쌍둥이 흉터를 일별할 때마다 자애로운 어머님의 품에 안겨 상처의 아픔도 덜게 하던 어머님의 유일무이한 자작 ‘명곡’인 자장가가 떠오르면서 오매불망 행복한 추억에 사로잡히군 한다.

일본제국주의침략자가 무조건 투항한 그 이듬해 봄 청명절 날, 난데없는 되알진 총소리에 우리 개구쟁이들이 달려가서 보았더니 바로 나의 셋째형이 빈 탄약통 밑굽을 앞집 대장간 벽을 향하여 돌 우에 놓고는 도끼등으로 내리치면 “땅-” 소리와 함께 밑굽 뢰관이 탄알처럼 대장간 벽에 박히는 것이였다. 이럴 때마다 10여명 되는 애들은 좋아라고 환성을 질렀다.

한번은 “땅-” 소리와 함께 이상하게도 제일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있던 나의 오른쪽 허벅지가 때끔하였다. 부지중 내려다보니 일본 군수품 천으로 새로 지어입은 바지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하도 이상야릇하여 바지를 내리고 보니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에 질겁하여 “와아-” 하고 우거지상이 되여 울음보를 터뜨렸다. 바빠맞은 셋째형은 부모님들의 꾸지람을 뒤에 한 채 급기야 소수레를 몰고 15리 상거한 벌밭골 의사집으로 달려갔다. 한족 의사는 상세하게 진찰하더니 다행히 뼈거나 혈관을 다치지 않았으므로 뢰관을 꺼내지 않아도 한번 쯤 화농한 다음 근육이 씌워지므로 별일 없을 거라고 하였다. 그제사 셋째형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고 근엄한 기색도 다소 풀리였다.

화불단행이라고 한마을에 사는 돌팔이 의사가 나서서 자기가 뢰관을 꺼낼 수 있다면서 납작한 침끝으로 살을 뚜져놓고 거기에 청강수(류산)를 떨궈놓았다. 생살이 타들어가는 데서 그 아픔은 형용할 수도 없이 구곡간장이 온통 찢어지는듯한, 마치 뼈를 깎아내는듯한 아픔이였다.

너무도 참기 어려워서 대굴대굴 구우는 나를 부둥켜안으면서 달래던 엄마는 아예 둘쳐업고 동네 애들이 뛰노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침 애들은 ‘말타기’ 놀음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놀음에 반하여 거의 아픔도 잊을 지경으로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 이후에야 안 일이지만 뢰관과의 거리가 1센치도 너머 되였는데 한심하게도 공연한 생 아픔을 청한 것이였다.

인위적인 첫 아픔이 멎자 같이 과연 한족 의사 말대로 병균에 의하여 상처가 화농하는 데서 또 참기 어려운 진통이 각일각 시작되였다. 엄마는 전처럼 대굴대굴 구울면서 객기를 부리는 나를 둘쳐업고 헝겊뽈을 차고 있는 애들을 찾아가서 섭쓸리였다. 이렇게 반나절, 열살이나 되는 나를 업고 달래노라니 엄마도 지쳤으련만 위안도 하고 애들 속에 끼여들어 ‘뽈을 차며’ 나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저녁에는 전번처럼 나를 꼭 껴안고는 내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고 보듬으면서 그 유명한 ‘자장가’를 또 불러주는 것이였다. 일자무식인 어머니의 자장가란 코노래 같이 천천히 길게 빼는 자작곡에 모두 16자 밖에 안되는 ‘가사’로 된, “자장-자장-애기-자장-, 우리-애기-잘도-잔다-” 를 몇십번이고 거듭 부르시는 것이였다.

아마도 그 때 어머님은 자식 아홉을 낳으셨으나 내 우와 아래로 셋이나 홍진미열로 가슴에 묻고 보니 지울 수 없는 세개의 응어리로 되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총’에 맞았다고 했을 때는 또 한번 경악했을 것이고 그 고된 동통에 신음하는 자식을 보고는 실로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진자리 마른자리 헤아릴 수 없었을 어머니, 자식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는 애잔한 마음, 외유내강의 어머니는 이전과는 달리 애절한 이 자장가로 조금이나마 자식의 고통을 덜어주고 자신의 심리고초도 삭였을 겄이다.

오늘 돌이켜보노라니 열살이나 되는 내가 자애로운 엄마의 품에 안겨 이 자장가 소리에 상처의 아픔도 참아가며 잠자던 그 때가 가장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시각이였음을 되새기게 된다!

그 이튿날, 동통은 멎고 화농된 상처에서는 누런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의 신음 소리에 가슴이 저려 살살 누르면서 고름을 짜내였다. 곁에서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어디 좀 보자꾸나.” 라고 하시면서 그 투박한 두 엄지로 나의 여리고 여린 허벅지를 상하좌우로 꽈악 눌러 고름을 짜는 것이였다. 나는 금시 숨이 넘어가는 상 싶어 괴상한 소리까지 질렀다. “애를 죽이겠습꾸마!” 라는 엄마의 만류도 들었는지 말았는지 연거퍼 몇번이고 쥐여짜니 마지막엔 머얼건 피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인젠 뛰놀게 됐다” 하며 안위시키는 것이였다.

아버지의 말대로 이튿날부터 나절로 밖에 나가 놀았고 비록 상처는 아물지 않았으나 사흗날부터는 애들과 함께 어울려 뛰놀게 되였다. 새살이 나는 데는 찰떡이 제일이라며 명절에나 겨우 먹을 수 있는 찰떡과 닭알 식보로 상등호리를 받은 데서 상처는 생각 밖으로 쉽게 나았다.

어언 류수광음으로 7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의 허벅지에는 일본침략자의 ‘탄편’이 만져지고 두개의 흉터가 시야에 안겨오는데 그 때의 그 아프던 기억은 가뭇없지만 자애로운 엄마의 눈에 비낀 애수를 보는듯, 그 감미로운 자장가 소리는 오매불망 내 흉벽 심처에 각인되여 항시 우렷하게 떠오르면서 내 생애의 력력한 무가지보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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