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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85] 손자 사랑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5-23 15:53:27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3)

▩배영남(장춘)

1999년 손자와 함께 남긴 사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 금쪽 같은 내 손자’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 손자를 사랑하고 귀여워할 것이다.

연변 룡정시 화학공장에 출근하던 아들 며느리는 층집까지 분배받고 잘 나가더니 1990년대 중반에는 공장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파산으로 가는 바람에 직장을 잃고 막벌이를 하게 되였다. 룡정에서 농사도 지어보고 자그마한 상점도 꾸려보았지만 씨원치 않아 1995년에는 공주령 진가툰으로 이주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국 로무 열풍에 아들은 고기잡이배로 나가 많은 고생을 하다가 1999년 10만원 리자돈을 내고 부부동반 한국연수생으로 가게 되였다.

그 때 손자는 만 여섯살 밖에 안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에 있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애처롭기 그지없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 거두어주는 만큼 손자녀석은 공부도 잘하고 씩씩하게 잘 자랐다. 그 모습이 장하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형님께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당시 우리 가정은 빚도 많았고 또 쉽지 않은 초청이라 한국도 구경할겸 더우기는 돈 벌어 빚도 갚고 부자 되려는 유혹에 우리 량주는 손자를 담임선생님에게 맡겨놓고 한국행을 선택하게 되였다.

그립던 한국 땅에서 고생하는 아들 며느리와 상봉하고 친척들도 만나서 그리운 정도 나누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머리속은 온통 손자 생각 뿐이였고 직장 걱정도 태산이였다. 20여일 후 안해는 한달에 인민페로 만원이나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지만 나는 손자와 사업 때문에 귀국하였다.

아들 며느리 그리고 안해와 눈물을 뿌리며 갈라지고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 지금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때부터 손자와 장애인 막내동생까지 셋이 한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손자 덕분에 분주한 하루는 빨리도 지나갔다. 1학년 다니는 손자는 아침 학교 갈 시간이 되였는데도 깨여나지 못했다. 단잠을 자는 손자를 깨우기가 안스러웠고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 할아버지는 생각이 착잡했다. 왜 부모곁에서 마음껏 사랑받으며 자라야 할 나이에, 그리고 부모가 없으면 할머니라도 잘 챙겨주어야 할 텐데, 참 복도 없는 손자놈이였다. 한국에서 사온 사발시계는 머리맡에서 련속 “꼬끼요, 꼬끼요, 어서 일어나세요.” 라고 소리쳤지만 무용지물 신세가 되였고 애처롭지만 억지로 깨워 세수시키고 밥 먹이고 가방 챙겨 학교에 보내고 출근하군 하였다.

오후 상과가 끝나면 학교에서 놀다가 마중 오는 할아버지를 보면 “할아버지!” 하며 멀리서부터 소리치며 뛰여와 품에 안기는 귀여운 손자, 하루 학교생활을 물어도 보고 숙제도 같이 하고 나서 잠자리에 누우면 옛말 해달라고 하고는 잠드는 손자, 부모와 함께 있을 때 그리고 할머니가 있을 때는 할아버지를 시답지 않게 여겼지만 의지할 곳이란 할아버지 뿐인 지금은 몸에 착착 붙는 손자다.

“할아버지, 사탕 사줘요, 과자 사줘요.” 눈에 보이는 대로 사달라고 조르고 언제나 나의 품에 안겨야만 마음이 놓여하고 공휴일 날에도 그림자마냥 나의 옆을 떠나지 않았지만 귀찮기는커녕 즐겁고 귀여워 저도몰래 볼에 입을 대였다.

솔직히 말해 내 자식 셋이나 키웠지만 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한족학교 교장으로 많은 학교 사업을 하면서 가정살림과 손자를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생활은 부엌에 불을 지펴 가마에 밥을 짓고 손으로 빨래하고 채마밭도 가꾸어야 했고 온갖 잡일도 많았다.

그 해 가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일요일 날 구들을 뜯었다. 구들방을 다 정리한 후 불을 때기 시작했다. 구들이 너무 뜨거운지라 이부자리를 두텁게 펴고 손자를 잠재우고 나서 나는 생활용품을 사려고 상점에 갔다. 상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잠시 한담을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방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손자가 깔고 자는 이불에 불이 붙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정신없이 더듬어 끌어안고 밖으로 뛰여나와 큰소리로 손자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나의 고함소리에 이웃이 달려와 함께 병원으로 갔고 의사의 인공호흡을 거쳐서야 손자는 깨여났다. 그 때서야 슬피 울던 나는 손자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면서 “이놈아, 오늘 네가 잘못되면 나도 죽으려 했다. 네가 없어지면 내가 어찌 살겠노.” 하고 넉두리를 했다. 어디에 부딪쳤는지 흐르는 피를 보고 “할아버지, 이마에 피가 흘러요.”라는 말에 “이 놈이 살았군.” 큰소리 치며 어디로 날아날가 꼭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할아버지, 울지 마.”라는 소리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귀여운 손자, 불쌍한 손자 꼭 쥐면 아플가, 놓으면 날아가버릴가 근심걱정은 내 머리를 떠날 수 없었다.

어린 손자는 마냥 귀엽지만 놀음에 탐하여 많은 일을 저질렀다. 한번은 친구들과 놀면서 이웃집 2메터나 되는 쇠대문을 타고넘다가 대문 꼭대기 창살에 엉뎅이가 찔렸다. 다행히 고마운 분이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가니 이미 여섯바늘을 꿰매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눈물이 가로막혀 아무 말도 못했지만 가슴이 찢어졌다.

한번은 퇴근 후 집에 오니 손자가 보이지 않았다. 갈만 한 곳은 다 찾아헤맸지만 그림자조차 없었고 온 동네를 훑으며 고함쳤지만 감감 무소식이였다. 다섯시간 후에야 겨우 찾았다.

나를 더욱 속상하게 하는 일은 항상 벙어리 장애인인 작은할아버지와 싸우는 것이였는데 맞아서 울 때가 잦았다. ‘벙어리 속은 낳은 어미도 모른다’고 그 때마다 속수무책이였고 어린 손자 손을 잡고 타이르지만 자기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말 그대로 몸도 마음도 지쳤고 외롭다는 생각과 더불어 드러눕기도 했다. 누워서 생각하면 삶을 위해 이국땅에서 하루 14시간 힘겹게 일하는 안해, 그리고 아들 며느리를 생각하며 일어났고 앞날을 생각하며 열심히 사업하고 손자를 사랑하면서 몇년을 견지하였다.

그 후 손자는 장춘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등전문학원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서 그립고 그립던 어버지 어머니와 아빠트까지 사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국땅에서 청년이 된 손자의 영상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린 시절 손자와 함께 했던 어려운 생활을 회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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