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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많은 “미인송”과 그 전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2-07 12:09:32 ] 클릭: [ ]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와 인민정부에서는 자치주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그해 연변을 상징하는 네가지 표지(标志)를 선정하였다. 즉 주산은 《장백산》(长白山),주수는 《미인송》(美人松),주강은 《해란강》(海兰江),주화는 《진달래》(金达莱)로 결정하였다.

그중 미인송은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희귀송으로서 연변 안도현 이도백하(二道白河) 지역에만 생장하고 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소나무가 조선과 일본에 있기는 하지만 수량이 극히 적고 껍질이 거칠고 가지가 많아 이도백하에 있는 미인송에 완전 비할바가 못 된다고 한다.

일찍 《미인송》은 《팔경대》(八景台) 또는 《백적송》, 《희귀나무》 등으로 불러지기도 하였다. 미인송의 키는 보통 30메터이고 최고로 40~50메터씩 자란 나무도 있다. 나무의 굵기는 대체로 직경이 40~50센치메터이고 수명은 약 300년이다.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이 미끈한 미인송은 푸른 하늘을 찌르고 곧게 솟아있다. 나무줄기는 색이 부드럽고 은은하며 사시장철 푸른 나무가지들로 우듬지를 장식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멋스럽고 운치가 있다.

우리 나라 10대 명산인 장백산에는 홍송, 백송, 흑송, 운삼, 박달나무 등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 망망 림해를 이루고 있다. “미인송” 은 주로 장백산에서 생장하면서 갖은 시련을 겪어왔다.

그젠날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선 우리 조상들은 장백산기슭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고달른 삶을 살아왔다. 무딘 괭이와 도끼로 나무와 잡초를 베여 화전을 일구고 감자, 보리, 옥수수를 심어 주린 배를 채웠다. 그들은 장백산의 크고 작은 산발을 타고 츠렁바위를 톱으면서 산짐승과 물고기도 잡고 버섯과 약재들을 캐면서 생활난을 해결하였다.

수림속에서 살다싶이 하던 이주민들은 조선반도에서도 보지 못한 희귀한 소나무를 발견하게 된다. 미녀의 몸매처첨 미끈한 이 소나무는 그 지역 여덟 곳에 자라고 있어 《팔경대》(八景台)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일본침략자들은 동북을 강점한후 연변의 항일유격대를 소멸하기에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유격대 대원들은 놈들의 거점과 군사시설을 파괴해놓고는 깜쪽같이 수림 속으로 사라지 군하였다. 항일유격대원들은 망망한 장백의 림해에서 《팔경대》소나무를 표적으로 여덟 곳을 거점으로 삼고 몸을 숨기면서 적들과 싸웠다.

놈들은 항일유격대의 종적을 찾기 위해 많은 정탐들을 수림 속으로 파견하여 유격대의 거점을 정찰하였다. 정찰과정에서 놈들은 《팔경대》소나무가 자라는 곳이 항일유격대의 활동거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놈들은 병력을 투입하여 여덟 곳의 《팔경대》거점을 향해 토벌을 감행하였다. 놈들의 소탕이 가심해지자 유격대원들은 놈들의 눈에 잘 띄우지 않는 바위동굴과 특수한 나무들을 목표물로 정하고 항일투쟁을 견지해나갔다.

일본놈들은 《팔경대》거점을 소탕하는데만 그치지 않았다. 놈들은 톱과 도끼로 《팔경대》소나무들을 마구 찍어서는 불태워버렸던것이다. 놈들의 피해로 겨우 살아남은 《팔경대》소나무가 지금 이도백하에 있는 나무인데 그것도 얼마되지 않는 작은 나무들이였다.

세계상에서 소나무를 극진히 사랑하고 노래하는 민족은 오로지 우리 조선민족뿐이라고 한다. 우리 이주민들은 얼마되지 않은 《팔경대》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무성한 잡초를 베고 물을 주고 흙을 북돋우면서 갓난아이 돌보듯 정성들여 키웠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신근한 노력으로 하여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채 력사의 뒤안길에 종적 없이 사라질 번했던《팔경대》소나무는 다시 이 땅우에 거연히 솟아있게 되였다.

이 《팔경대》소나무가 《미인송》으로 불려진 데는 또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세계적으로 삼림면적이 제일 많고 나무에 깊은 연구가 있는 구 쏘련의 탐사전문가들은 1950년대 중반에 우리 나라의 요청에 따라 장백산과 망망한 장백림해에 대한 탐사를 진행하게 되였는데 그 과정에 《팔경대》소나무를 보고 크게 놀랐다.

한것은 세계적으로 이처럼 희귀한 나무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였던것이다. 그들은 이 희귀나무를 안아도 보고 손바닥으로 쳐도 보고 사진도 찍고 지어 나무에 입도 맞추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이토록 희귀한 나무가 《팔경대》,《백적송》이라 평범하게 불려지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며 아름다운 미녀와 같다는 뜻에서 《미인송》(美人松)이라 부르자고 하였다.

당시 오래동안 장백산나무에 대해 연구해온 조선족연구일군들과 중국의 탐사일군들도 그 이름에 한결같이 박수를 보냈다. 즉 나무와 이름이 잘 어울린다며 두 나라 사업일군들은 모두 기뻐하고 만족해했다. 그후부터 《팔경대》,《백적송》,《희귀나무》등으로부터 《미인송》으로 불러지게 된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중국과 쏘련간의 외교관계가 긴장해지고 게다가 “문화대혁명”이 겹치면서《미인송》은 《쏘련전문가》들과 중국연구일군들이 함께 지은 이름이라는 말은 입밖에 내지도 못하였다. 그후 따사로운 개혁의 봄바람이 장백림해에도 불어와 미인송도 자기의 아름다운 이름과 몸매를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말, 길림성 성장을 비롯한 연변주당위와 주정부의 지도자들이 함께 장백산과 장백림해에 대한 한차례 고찰사업을 하게 되였다. 그때 성지질국, 성예술청, 성립업청과 주림업국의 책임자들도 참가하였으며 촬영기자 신분으로 황범송선생도 함께 동행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번 고찰회의에서 평생 장백림해를 고찰해온 당시 70세에 가까운 조선족 나무전문가 한분이 “미인송”이 겪어온 시련의 력사를 들려주었다. 황범송선생은 그때의 그 인상담을 필자한테 자상히 들려주었던 것이다.

자치주창립 30주년을 맞으면서《미인송》은 연변을 표징하는 주수로 되였고 연변의 여러 민족들은 미인송을 알게 되였고 또 미인송을 칭송하는 많은 시, 노래, 춤, 사진, 미술 등등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리하여 장백산과 미인송의 지명도도 한결 높아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 김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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