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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기행]벌꿀의 강기슭에 피여난 진달래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12-29 13:19:25 ] 클릭: [ ]

김호림(북경) 

마치 모든게 요술과 같았다. 마을 하나가 문득 강기슭에 나타났다.

수백명의 인구가 갑자기 이사하여 이곳에서 살았다. 언덕에 일부러 심은 진달래는 해마다 연분홍의 꽃을 피워 남먼저 봄의 향기를 흩날렸다. 마을에는 꼬끼오하는 닭의 울음소리가 울렸고 밥짓는 연기가 굼실굼실 피어올랐다.

이름 그대로 진달래처럼 강기슭에 피어난 진달래촌은 그들에게 더는 낯선 고장이 아닌 고향으로 되고있었다.

우린 예전에 울바자를 사이에 두고 함께 살았지요.” 일행을 안내하던 김태욱(1938년 출생)옹은 길어구에서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더니 이렇게 해석했다.

그들은 봉밀하의 중류에 있던 장항촌태생이었다. 봉밀하는 글자 풀이를 한다면 벌꿀의 강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을 두고 항간에는 향긋한 꿀맛이 풍기는 이런저런 전설이 구전되고있었다.

그럴지라도 봉밀하는 꿀맛의 달콤한 기억만 남긴게 아니였다. 몇년전 이 봉밀하에는 보기 드문 큰물이 졌다. 이때 닭이며 돼지따위가 강물에 나무잎처럼 둥둥 떠내려가는 희한한 풍경이 연출되였다. 난데없는 물난리에 아수라장이 되였던 장항촌은 새마을 진달래촌으로 집단이주를 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기실 장항촌은 옛날 간민들이 봉밀하의 물난리를 피해 찾았던 길지였다고 전한다. 19세기말 20세기초,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살고있던 이씨 가족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런데 바다기슭의 고향을 등졌다고 동해의 룡왕님이 심술을 부렸는지 최종 정착을 하기까지 물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화룡을 거쳐 토산에 왔는데 두곳 다 석탄이 묻힌 지역이라서 수질이 나빴다. 토산은 진달래촌 서남부에 위치, 주변에 초목이 자라지 않는 밋밋한 흙산뿐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강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떴다. 그곳은 봉밀하의 상류였다. 그런데 비가 내린후면 와와 소리를 지르며 계곡을 흘러내리는 골물에 기겁을 했다.

“이거 물이 터지면 잠을 자다가 떠내려갈지도 모르겠구먼.” 그들은 미처 이사짐을 다 풀기전에 또 자리를 떴다. 막상 그렇다고 해도 강을 멀리 떠나기는 싫었다. 그냥 물걱정을 달고다녔던 탓일지 모른다. 그들은 강기슭을 따라 내려오다가 버드나무가 늘어선 작은 벌판에 이르러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주변의 산세가 좋았고 땅이 기름졌다. 허리를 치는 쑥을 엎어 버리자 싱긋한 땅냄새가 금세 향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들은 나무를 베여 귀틀집을 지었고 땅을 갈아 기장을 심었다. 뒷산에 울리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호젓한 이 시골집에 시같은 운치를 만들고있었다. 그해 가을 기장은 저마다 개꼬리만한 이삭을 땅에 드리웠다.

리씨가족의 인솔자 리창민은 간도땅을 밟은후 처음으로 얼굴에 함박같은 웃음꽃을 피웠다. 그는 급기야 고향의 친지에게 희소식을 알리는 편지를 띄웠다.

“정말 살기 좋은 고장을 발견했네. 어서어서 이곳으로 오게나.”

그때부터 애기의 태어난 기쁨이 있었고 또 지붕에 비가 새는 시끄러움이 생겨났다. 나중에 부락의 사람들은 옛고향의 이름을 갖다가 리원촌이라고 불렀다.

이역의 심산에는 바다가의 리원군이 그렇게 하늘의 조화처럼 문득 나타났다.

훗날 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원래의 리원군 향민의 이미지는 차츰 퇴색한다. 그래서 1933년 마을이름을 달리 짓기에 이르렀다. 장항이란 이름은 이때 마을서쪽의 산모양이 흡사 노루목과 같게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잠깐, 여기서 이야기는 또 다른 가닥을 잡게 된다. 장항촌 즉 리원촌의 첫 개척민인 리창민은 다름 아닌 김태욱옹의 외조부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정말 거짓말로 느낄 정도이다. 김태욱옹의 증조부는 바로 리원군의 이웃동네인 단천군 태생이라고 한다. 증조부의 이민사는 더구나 한부의 “소설”을 엮고있었다.

증조부 김시화는 초시 합격자로 서울에 가서 과거를 보려다가 붓을 팽개치고 의병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매국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1905년 무렵이었다. 그는 훗날 홍범도가 인솔한 의병에 가입, 중대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병부대를 조직하며 을미의병 해산이후 산포수생활을 하면서 항쟁을 계속했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포수들을 모아 기병했다.

의병들의 항쟁은 일제가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불가능하게 되였다. 그들의 무력항쟁 무대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으로 옮겨지며 명칭도 독립군으로 바뀐다. 이때 이 일대에는 백만으로 헤아리는 백의겨레가 거주, 독립군의 활약에 터전을 마련해주고있었다.

홍범도 역시 이때 의병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간다. 그는 나중에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였으며 독립군을 이끌고 국내에 들어가 갑산과 혜산 등 지역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훗날 독립군이 올린 전과중 최대의 승전을 기록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지휘중심에는 모두 그가 서있었다.

김시화는 홍범도를 따라 국내를 떠나기전에 작별인사를 하려고 단천군의 고향집에 잠깐 들렸다. 그런데 누군가 경찰서에 밀고를 할 줄이야. 이때 고향사람들은 “김시화를 풀어 놓으라!” 하고 외치면서 경찰서 앞에서 농성을 했다고한다. 나중에 김시화는 의병운동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를 걸고 간신히 풀려났다. 그날로 김시화는 온 식솔을 데리고 철야도주하여 압록강을 건넜으며 장백현 12도구에 자리를 잡았다.

김시화는 정착하기 바삐 독립지사들과 연줄을 달고 반일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블랙명단”에 올랐으며 1920년 경신년 대토벌이 시작되자 또 식솔을 데리고 급급히 도망한다. 그때 다시 강을 건너 함경북도 무산에 갔다가 화룡을 경유하여 이곳 봉밀하 기슭으로 찾아왔던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봉밀하가 흘러 지나는 70리의 계곡은 하늘의 용과 땅의 범이 형적을 감출수 있는 땅이었다. 기실 봉밀하는 양안의 산봉우리가 빽빽하다는 의미의 봉밀하(峰密河)이며 벌꿀의 강이라는 봉밀하(蜂蜜河)는 와전된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무렵 김시화는 땡전 한푼없는 빈털터리로 되고있었다. 단천에서 탈주할 때 가산을 몽땅 버렸고 장백현에서 도망할 때 또 맨 주먹만 부르쥐고나왔다. 그야말로 룡이라면 염주가 없고 호랑이라면 꼬리가 없는 셈이었다.

결국 식솔 10여명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헤여지게 되였다. 이때 김시화의 맏손자는 리원촌의 부자 리창민의 머슴으로 들어간다. 맏손자는 장장 8년 동안 머슴으로 살았다. 진솔하고 부지런했던 그는 나중에 리창민의 눈에 들었다. 그에게 시집을 보내면 딸은 평생토록 굶을 걱정을 끌어매도 될것 같았다.

“그래서 땅을 떼주고 또 집을 사줬다고 해요. 머슴을 데릴사위로 삼은거지요.” 머슴과 주인집 딸이 혼인하는 또 하나의 “소설”이 엮어진것이다.

1936년 맏손자 결혼잔치 기념사진. 왼쪽 두번째 갓을 쓴 사람이 리창민임.

이쯤하면 다들 속짐작을 했겠지만 그 머슴이 다름 아닌 김태욱옹의 부친이다. 김태욱옹은 머슴의 둘째 아들로 장항촌에서 나서 자랐다.

장항촌은 마침 김태욱옹이 인생의 중턱에 올라 서있던 지난 세기 80년대 전성기를 맞으며 130여 가구의 5백여 명 인구를 자랑했다. 그러나 새마을로 이주하면서 현재로선 일여덟 가구가 궁상스럽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김태욱옹은 집단이주에 훨씬 앞서 장항촌을 떠났다고 한다. 1984년 과수기술원으로 초빙되면서 동쪽의 서성으로 이사했던것이다. 서성은 경내에 발해국의 옛 도읍인 중경현덕부의 성터 서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진소재지는 이도구에 위치하는데 이도구는 하곡분지의 동쪽으로 두번째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예전에 발해의 도읍이 서성의 명함이였다면 지금은 새마을 진달래촌이 브랜드로 떠오르고있었다. 진달래화원, 진달래문화축제, 진달래광장, 민속농가 등 명실공한 조선족민속 제1촌으로 발돋움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이 진달래의 향기속에 노루목의 장항촌이 사라지고있는것이다. 아니, 리원촌은 더구나 까마득히 잊힌 옛날 옛적의 마을로 되고있었다.

기실 장항의 첫 주민은 리원군의 사람들이 아니였다. 예전에 마을 서쪽에는 발해시기의 석성이 있었다고 한다. 뒷산에서는 고분이 여러 기 발굴되였고 또 쇠로 만든 활촉이 자주 발견되였다. 어린 김태욱은 늘 활촉을 주워서 집으로 갖고 왔다고한다. “소꿉친구들과 함께 활촉에 꼬챙이를 박아서 과녁 맞히기 장난을 했지요.”

나중에 옛 석성은 논을 풀면서 평지로 되였고 꽃잎처럼 차츰 집단기억에서 스러졌다.

진달래는 봄마다 또 피지만 예전의 그 꽃이 아니다. 옛날 이 고장에 살았던 선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 그들의 이야기를 해와 달처럼 진달래의 향기에 오래도록 남길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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