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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꿈을 키우는 황미령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본지종합 ] 발표시간: [ 2011-02-15 14:30:05 ] 클릭: [ ]

연변의 자랑, 연변조선족의 딸

휴식일, 명절도 모르는 이 밤,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은은히 들려오는 피아노소리. 20년을 하루와 같이 고독을 삼키며 부모, 친인에 대한 그리움도 접어가며 피아노연주에만 몰입해온 나어린연주자, 이제 새 학기에는 석사연구생 신분으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이 새별은 누구일가?

그가 바로 북경중앙음악학원에 가 공부를 마치고 새 학기에 학교측의 유일한 추천생으로 석사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연변조선족의 딸 황미령이다.

《고독을 이기지 못하면 성공의 희열을 만끽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의념과 의력이 있었기에 그는 2009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오스트리아에서 펼쳐진 제31차 ALLEGRO-VIVO국제음악제 음악대상콩쿠르에서 세계 30여개 국가들에서 온 경쟁자들을 누르고 대상의 월계관을 안게 되였다.

그가 마지막코스에서 연주를 끝마치자 그칠줄 모르는 박수소리는 그의 연주수준을 열렬히 긍정했다. 그가 퇴장하였지만 박수소리는 더욱 고조되였다. 그는 련속 5섯번이나 다시 등장하여 인사를 올려서야 기립박수를 멈출수 있었다.

크나큰 긍정과 고무를 주는 수차의 박수는 그에게 진정한 희열의 감수를 느끼게 하였다.그것도 그럴것이 그가 달려온 20년, 배움의 길은 이 시각에야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맞이하게 되였고 부모님과 친인들과의 석별의 정도 가슴에 새기며 달려온 그녀로서는 이 시각 어찌 벅찬 감격을 느끼지 않을수 있으랴.

그의 눈가에는 행복의 이슬이 고였다. 남들은 부모, 친척, 친우들까지 달려와 응원하는 마당에 그는 홀로 자기를 위로하며 한번 또 한번의 평가전에서 봉우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미령이는 매 걸음마다에 몰부은 부모와 친인들의 정성을 돌이켜보게 되였고 피아노공부에서 계몽기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매 단계마다에서의 은사님들의 따스한 가르침과 관심에 감사하며 행복에 잠겼다.

세계급의 음악대상, 마치 꿈을 꾸고있는것과 같았다. 그것도 세계음악대가들로 구성된 여러 나라의 10여명 전업평심가 평심위원회는 어마어마하다. 더우기는 단지 피아노만 아닌 각 나라에서 추천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 실내악 등등 악기들도 참가한가운데 음악대상을 수상한다는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비행기에 앉아 귀국하는 동안 탑승객들은 모두 꿈나라에 들어 갔지만 미령이는 스쳐지나는 구름에 초점없는 시선을 던졌다. 지나온 성장의 길이 영화필림마냥 그의 앞에 재현되였다.

음악세가에서의 유년시절

미령이는 연변가무단 기악부 비올라연주원 황기욱(연변가무단 국가 1급 작곡가, 가무단창작실 주임)과 독창가수 김순녀(국가 1급 독창가수. 현재 연길시예술중심 보관서류실 주임)의 귀독녀로 태여났다.

 

2009년, 오리지에서 열린 세계콩크루에서 대상을 받고 주평심과 수상자들과 함께, 첫번째줄 오른쪽 황미령

태교때부터 음악소리를 들었고 태여나서 업혀다니는 곳마다에서 음악소리와 접하였다.그의 어머니는 임신 3개월에 독창음악회를 가졌으니 미령이는 태여나기전에 벌써 무대에 등장한 셈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순회공연에 나서면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있어도 역시 늘 음악과 만났다. 할아버지 황룡화(국가 1급 연주원)는 연변가무단의 비올라연주원이였고 할머니 박송자(미령이 4살에 사망) 역시 연변가무단 가수였으니 말이다.

혹 작은삼촌 황기연(현재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북경총대대 군악단의 중좌군관 겸 제2대 대대장)과 함께 있는 날이라도 바레돈연주소리(지휘 겸) 뿐이였다. 이같이 앉으나 서나 음악과 《씨름》하는 가족환경, 참으로 음악세가에서 행운스럽게 성장했다.

《싸리그루에서 싸리난다》고 6섯살 잡던 해로부터 그는 할아버지 자전거 앞에 앉아다니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첫 계몽선생은 연변대학예술학원 피아노학부 주임 장철명(张铁明)교수였다.

선생은 미령에게 수선 먼저 재미로 음악의 즐거움을 깨우쳐 주었다. 미령이는 그속에서 작은 마음에 꿈의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미령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약속된 시간을 어길세라 레슨받으러 가군 했다. 할아버지가 순회공연을 나가면 또 애고사리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루도 빠짐없이 배우고 배웠다.

《정성이 지긋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은사님과 가족들의 정성, 미령이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95년에는 전 주 피아노콩쿠루에서 1등의 영광을 지니여 음악세가는 환락으로 들끓었다.

음악연주에 승부를 건 청춘시절

10살 되던 해, 피아노공부에 게을리하지 않은 그에게 또다른 행운과 기쁨이 날아왔다. 길림성에서는 미령이를 지명하여 장춘진달래예술단 일원으로 한국의 9개 성시 순회공연팀에 참가해달고 요청해왔다.

황미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속에서 선생님들과 동년배들의 부러움속에서 한국순회공연에 나섰다. 그번 공연을 통해 그는 음악세계의 참뜻을 얼마간 터득했고 이 길에서 승부를 걸고 달리려는 꿈을 부풀렸다.

1998년, 미령이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대학예술학원(소학반)에 입학하였고 계속 장철명(张铁明)교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피아노전공에 돌입했다.

끈질긴 그는 날이 갈수록 차원높은 수준으로 치달아 올라섰다. 1999년 학교에서는 그의 뛰여난 피아노 연주수준을 긍정하면서 전 성 피아노콩쿠르에 추천했다. 성공의 열매는 항상 노력하는 사람에게 속하는 법, 그번 콩쿠르에서도 미령이는 또 1등의 영예를 안아왔다.

이로하여 미령이는 길림성은 물론 연변의 새별로 부상되여 어린 나이에 주변의 인기인물로 자리매김을 했다.

음악의 더 큰 세상을 향하여

  
2000년부터 2001년사이 미령이는 아버지의 스승인 저명한 작곡가, 피아노연주가, 교육가, 리론가인 조소생(赵晓生)교수를 또 스승으로 모시고 중국음악인들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중앙음악학원부속중학교(中央音乐学院附中) 진입을 위해 새 도전을 걸었다.

2001년, 중앙음악학원부속중학교에 순조롭게 입학한 그는 장지위(张志玮)부교수의 제자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재교기간 매년마다 학교의 장학금을 받았다.

타향 멀리 부모를 떠난 나어린 그녀는 병 들어도 혼자, 슬퍼도 혼자, 고독해도 혼자 이겨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오직 피아노뿐이였다. 그는 모든 아픔을 피아노소리로 날려보내군 했다.

이러한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그는 2003년과 2005년 사이 TOYAMA 아세아청소년피아노콩쿠르(북경구역)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매번 큰 연주회나 콩쿠르가 있을 때마다 학교측에서는 미령이에게 기회를 주군 했다. 그후 2004년 연변대학예술학원 음악청에서 있은 그의 계몽선생인 《‘장철명(张铁明) 추모’ 음악회》에 초청되여 피아노연주를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독일에 가서 교류공연연주회에도 참가하게 되였다.

학생신분으로 여러 사회활동에 지명초청되여 참가하는 와중에도 그는 오매에도 그리던 중앙음악학원 전업시험 연주곡련습에 날이 가는줄 몰랐다. 2007년, 13세부터 독신생활을 한 딸애에게 얼마간의 힘이 되고저 어머니가 북경에 가 도왔다.미령이는 전업시험에 무난히 통과되였다.

이번에는 문화과시험을 위한 준비로 밤을 샜다.시험장에서 딸은 웃으며 나왔다.그랬어도 어머니의 마음은 조여만 들었다.

삼복철 더위속에서 통지서를 기다린다는것이 하루가 삼추같았다. 드디여 문화과시험 점수가 발표되였다. 미령이는 학교의 록취선보다 100점이나 넘쳐 잘 맞았다. 그 순간 미령의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미령이는 도리여 아주 평온한 기색이였다. 반면에 이 소식을 접한 미령의 아버지는 몇날 며칠 입을 다물줄 몰랐다. 음악세가는 또 명절의 분위기에 휩싸여 서로 전화로 축복의 메세지를 전하였다.

음악의 전당에서

 

2007년 록취후 중앙음악학원대청앞에서 부모님과 함께

2007년, 미령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앙음악학원(中央音乐学院) 피아노학부에 입학, 중국의 저명한 피아노연주가이며 교육가인 두태항(杜泰航)교수을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교수를 받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선천적으로 음감이 좋은 미령이를 두교수는 귀엽게 여겼고 알심들여 가르쳐주었다. 이같이 중국음악의 최고전당에서 세계를 놀래웠던 피아노연주 대가를 스승으로 모신 미령이는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손끝이 터지도록 피나노연주를 하면서 자기가 즐기는 전업에서 새로운 도전길을 걸었다.

교수님들은 리론교육과 실용교육을 전수하는 한편 인성교육도 중시했다. 대학은 미령이를 빨리 성장시켰다. 또한 그에게 더 큰 꿈을 키우도록 신심과 의력를 키워주었다.

대학입시는 그의 전부의 목표가 아니였다. 그는 대가들의 교학을 받으며 자신이 하루 빨리 새 차원에 오르기 위해 정력을 쏟았다. 하여 입학한 첫해부터 졸업할 때까지 피아노전업 시험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덕으로 해마다 학교장학금으로 공부할수 있었다. 담임교수와 부과 교수님들은 자연 이 조선족학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에게 성원을 보내주었다.

기회는 자신이 원해서 차려지는것이 아니다. 오직 게으름없이 달리며 자기가 하고저하는 일에 정력을 몰붓는 자에게 안겨지는것이다. 그렇다고 미령이는 기회잡기에 왼심을 쓴것이 아니였다. 오로지 충실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일심정력으로 달렸을 뿐이다.

 

그는 온갖 유혹에 눈길 돌릴사이도 없이 오직 피아노연주실력을 높이기에만 진력했다. 그는 매 단계의 피아노협주곡이나 독주곡을 분석하고 정확하게 연주하기에 땀을 쏟았다.

이러한 모습은 학교측과 주변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2007년 중앙애악악단(中国爱乐乐团)에서 중앙음악학원 피아노학부에 와서 《북경대학 백년기념당 및 세계 저명한 작곡가 거리거(格里格) 탄신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위해 피아노연주를 담당할 연주원을 물색하였다.학교측에서 추천한 5명중 미령이의 연주기능이 음악회 담당지휘 석숙성(石叔诚)에게 당장에서 점찍혔다.

석숙성지휘가는 세차례나 미령이를 댁에 불러 곧 열리게 될 거리거음악회 피아노협주곡을 친히 함께 연주하면서 미령의 연주기질과 수준을 관찰했다. 선생은 사모님에게 점심식사까지 부탁했고 나어린 재교학생을 고무했다. 후일 안 일이지만 석숙성지휘가의 강의비는 한시간에 2000원이라고 한다. 미령이는 곁눈도 팔지도 않고 석숙성선생님의 강의를 받았다. 학교 교수님들은 물론 같은 전업의 학생들은 《미칠》지경으로 부러워했다.

2009년 4월 12일,북경음악대학에서 오자와(일본지휘)와 함께

음악회에 앞서 있은 련습시 지휘가 석선생은 미령이를 전체 악사들에게 소개했다. 련습이 끝나자 선생님들은 미령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기적이야, 기적. 악단이 서서 재학생이 동참한 연주는 처음이야. 축하한다. 잘했어…》 라고 련속 축하를 보냈다. 미령이는 자신에게 자답했다. 《잘해야지!》

드디여 음악회날이 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연변의 음악가들도, 아빠 엄마도 자호감을 안고 북경음악기념당에 도착하였다. 음악기념당 출입구 옆 큰 포스터에는 피아노연주를 하는 미령의 사진도 돋보이게 박혀있었다.

음악당에 들어서면서 음악회 프로그램을 받은 미령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그램에 딸의 사진은 있지만 이름은 없었다. 재학생으로서 어마어마한 중앙애악단 연주단에 들어 연주한다는것만으로도 만족하라는 남편의 말에 엄마는 얼마간 마음의 평형을 잡았다.

석숙성지휘가는 미령이를 지명하여 그가 단독으로 사용하는 분장실로 불러들여 복장과 분장을 책임진 부인에게 미령이의 분장을 돕도록 부탁했다.

음악회 상반부는 거리거의 피아노협주곡(45분)으로 되였고 하반부는 관현악으로 구성되였었다. 음악회가 시작되자 미령이가 등장하여 곱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연에 미령이의 부모는 물론 전 장내가 놀랐다. 명성이 드높은 풍도있는 석숙성지휘가가 미령이를 지명하여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는 북경의 각 명문대학의 교장들과 지명인사들, 세계 각국의 지명인사들 및 관객들에게 미령이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오늘 음악회 상반부 피아노협주곡에서 피아노연주를 담당할 연주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바로 장백산아래 연변이 고향인 중앙음악학원 재교생 황미령양입니다.》

장내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하여 《오늘 프로그램에는 저희들의 오차로 죄송스럽게도 황미령연주자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이에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또다시 웅성거리며 프로그램을 펼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미령이는 송구스러워 어쩔바를 몰랐다. 이때 수석 바이올린연주가가 일어나더니 미령에게 생화를 안겨주었다. 장내는 우렁찬 박수소리로 들끓었다.

거리거의 긴 피아노협주곡 연주가 끝나자 우렁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지휘가는 두팔을 벌려 어린 미령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장내는 또다시 큰 박수로 고조를 이루었다.

미령의 엄마도 아빠도 감격의 눈물이 두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몰라보게 성장한 딸애의 연주기능에 넋을 잃고 입도 다물지 못한채 손바닥이 터지도록 박수를 치고 또 쳤다. 그들 부부는 기쁨과 행복에 잠겨 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줄 몰랐다.

음악학원에서 미령의 담임교수를 맡은 두태항(杜泰航)교수는 늘 미령이를 남한테 소개할 때면 《아직 졸업하지 않은 작은 피아노연주가다》고 소개하군 한다.

2007년은 참으로 행운에 날개가 돋힌 해였다. 이 해에 학교의 선발을 통해 미령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음악제에 추대되였다.

하지만 미령이도 매번 순풍에 돛단 격은 아니였다. 딸애가 처음 국제콩쿠르에 나서는지라 아빠엄마도 응원할 겸 함께 먼 행로에 나섰다.국제무대경험이 없는 미령이는 연주에 앞서 긴장감을 떨칠수 없었다. 하여 1등의 월계관을 따지 못했다. 그때 미령은 속다짐했다. 이제 다시 은사님들과 부모님들을 실망시킬수 없다. 돌아오는 경색년을 목표로 달려야 한다고 다졌다….

땀 뿌려온 3년, 밤 새워 달려온 3년, 그날은 드디여 오고말았다. 오늘날의 1등의 월계관이 바로 꿈을 실현한 현장이 아니였던가…

비행기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미령의 입가에는 기쁨의 미소가 흘렀다.

2009년, 중앙음악학원 은사 두태항(杜泰航)교수와 함께 이딸리아 위니스에서

음악의 더 높은 차원을 향하여

2010년, 음악학원 졸업을 앞두고 석사연구생을 선출하는 일로 해당 교수들은 골머리가 아프다. 나라의 혜택으로 더 깊은 조예를 닦을 가치가 있는 연구생을 선출하기에 성실하고 능력있고 품덕을 갖춘 자를 엄격하게 심사해내야 한다.

1학년부터 졸업까지 련속 1, 2등을 자리매김한 미령이는 이 점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질 리유가 없었다. 다음 재교시기 각종 국내외의 콩쿠르에서 성과가 돌출하기에 학교의 새별로 떠오른 미령은 역시 압도적이였다.

추천연구생 명단이 나오는 날, 미령이는 고향에서 달려온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음악학부 흑판보앞에 대기하고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어서 1분 시간은 똑 마치 1년 지나듯 긴긴 시간이였다. 마음이 타들어가는 시간이였다.

드디여 합격자명단이 흑판에 나붙었다. 《와-?! 성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너무나 익숙한 딸의 이름을 읽고 또 읽었다. 부모님들은 미령이를 안고 축복하였다.

음악세가는 딸의 스승님께 인사를 드렸다. 미령이도 조용히 허리굽혀 은사님께 인사를 드렸다. 은사님은 《네가 안되면 누가 된다더냐. 축하한다. 계속 노력해…》 그리고는 힘있게 미령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부모님들이 재차 선생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자 스승님은 신심가득히 《부모님앞에는 미령이가 어린애로 보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미령이는 언녕부터 나래 돋힌 작은 피아노연주가입니다. 이제 더 잘할겁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응원해 주었다.

미령이는 말한다. 《사람은 꼭 자기만의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누구든 절대로 자신의 꿈을 버리지 말라!》

2009년 8월,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세계콩크르에서의 황미령

배움에서 싫증을 모르고 항상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이 음악세계에 파묻혀 성장해온 미령이는 이제 그의 원대한 목표인 피아니스트(연주가)가 되는 길에서 알찬 성과로 최고에 오를것이다. 이제 그는 유난히 빛을 뿌리는 음악세계의 새별이 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여하리라 기대해본다.

글: 김학송 (연변가무단 창작실 국가 1급 편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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