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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무용 그리고 헌신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12 12:15:21 ] 클릭: [ ]

조선족 민간무용예술계의 숨은 금별최금성무용가에 대한 이야기

 
고향 연변에서부터 지구의 반대편인 미국땅에서 조선족 무용예술계의 숨은 금별최금성무용가님을 발견하게 되였다.

조국의 해방전쟁과 조선전쟁에 참전한 녀영웅이며 연변예술학교 창시인의 한사람이며 조선족무용예술교육의 정초자의 한사람인 최금성무용가와의 만남은 그 반가움을 넘어 경이로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50년대에 연변가무단에서 저명한 클라리넷 연주가인 백문순음악가와 단란한 예술가 가정을 꾸리고 평생을 연변의 조선족 민간무용을 위하여 온몸과 마음을 바쳐왔다. 2007년에 남편이 세상을 뜨게 되자 미국에 류학 와서 자리잡은 백철음악가를 비롯한 세 자녀들은 홀로 된 어머님을 미국에 모셔왔다.

올해 85세 고령인 군인 출신 최금성무용가는 직업병으로 인한 관절이 다소 안 좋을 뿐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건강하셨고 흘러간 오랜 세월의 추억의 편린들을 더듬어가며 파란만장했던 무용가의 삶을 회고하였다.

동북전쟁에서 무용가의 꿈을 키워가다

최금성이 13살 되던 해에 료녕성 신빈현 고향을 모처럼 방문한 정진옥예술단의 아름다운 녀성무용은 시골소녀의 마음에 무용가로 될 황홀한 꿈을 심어주었고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자신감까지 심어주었다.

1947년, 16세 소녀시절에 최금성은 당차게도 참군하여 리홍광지대 독립사단 (중국인민해방군제166사, 제4야전군) 정치부 문공단 무용부에 편입되여 정진옥선생과 6년간 한전호 속의 전우로 지내다가 같은 날 제대하였다.

최금성은 포연탄우 자욱한 전쟁터에서 최전방에 탄약들을 메여나르고 간호원들을 도와 부상병들을 보살펴주며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전사들의 찢어진 군복들을 꿰매주는 등 모든 일들을 령활하고 적극적으로 해내였다.

전쟁이 멈추는 시간이 되면 그는 오매불망 그리던 소원 대로 부대문공단 김인해 지도원에게서 강렬한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무용을 배웠다.

그동안 잠재되여있던 그의 천부적인 무용가 재능이 신기하게도 전쟁터에서 나날이 꽃펴나기 시작하였다.

총성이 사라지면 부대문공단의 위문공연과 함께 신나고 흥겨운 무용으로 전사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부여해주고 승리의 신념을 안겨주던 최금성은 영광스럽게 ‘소공 1차’공을 세웠다.

1949년 5월에 그의 문공단은 북경에 초청되여 감격스럽게도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고 <소고춤> 등을 공연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온몸을 불사르며 배운 조선족 민족무용

1949년 7월,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던 리홍광독립사단은 상급의 명령에 따라 비밀리에 조선인민군 제6사단에 편입되였고 문공단 군악대와 춤과 노래에 뛰여난 일부 배우들만 선발을 받아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선인민군협주단에 가입했다.

최금성은 본격적으로 라쓰키(조선인)라는 유명한 무용단 지도원한테서 전설의 무용대가 최승희 무용기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비약과 도전을 꿈꾸고 있었다.

해방군 제166사 정치부문공단 녀성 일동, 앞줄 오른쪽 첫번째 최금성(1949년).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1950년 6월에 조선전쟁이 발발하면서 문공단은 두팀으로 분산되여 조선인민군에 소속되였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거쳐 대구까지 밀고 내려가며 승승장구하던 조선인민군은 락동강 방어선에 부딪히면서 공격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고 잇따른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북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최금성 소속 제6사단은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푹격과 비발치는 탄우 속을 헤가르며 도토리로 끼니를 떼워가며 험산준령을 타고 넘어 천신만고 끝에 평양까지 이르렀지만 무력하게 함경북도 자강도까지 밀려올라갔다.

그 위기일발의 시각에 혜성같이 나타난 중국인민지원군이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었고 평양을 수복하게 되자 문공단은 다시 조선인민군협주단에 복귀하였다.

6.25 민족상쟁의 비극의 력사적 증인인 최금성씨는 수많은 전우들을 잃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페허가 된 평양땅을 딛고 다시 2년 동안 온몸과 마음을 불사르며 최승희 조선무용과 무용창작의 정수를 흡취하면서 우리 민족의 무용가로 꿋꿋하게 성장하였다.

가렬처절한 락동강전역에 참가했던 최금성은 ‘전사영예훈장 2급’을 수여받고 1953년 7월 휴전협정 후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채춤>을 재창작하여 고품격 민간무용예술로 승화

최금성은 1954년 봄에 연변가무단에 입단한 지 얼마 안되여 김태희단장으로부터 1951년에 농민회연대회에서 양창윤이 선보였던 재래춤인 <부채춤>을 보다 격조 높은 무용으로 재창작하여 연변가무단의 예술무대에 올릴 제의를 받았다.

‘조선족 민간무용은 대중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궁극적으로 대중들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는 취지하에 최금성은 즉시 이불짐을 싸들고 조양천 근교 농촌에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민간예인 양창윤할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창작의도를 파악하고 민간춤동작들을 연구하였다.

3인무 련습중 박종규, 최금성, 박용원.

1954년에 마침내 4인조 재래춤으로부터 8인조 녀성군무로, 한손에 부채를 펴들고 다른 한손으로 치마꼬리를 펴들고 휘휘 감돌아치는 연변 부채춤이 우아하고 예술적인 민간무용으로 재창작되였다.

부채춤은 농후한 민족풍격과 섬세한 향토기질을 담은 높은 형상성과 표현성으로 중국무용대표단의 종목으로 선정되여 중앙가무단의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1955년 4월, 뽈스까 수도 와르샤와에서 열린 제5차 세계청년예술축전무대에서 금상을 수여받았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연변의 부채춤은 많은 무용가들에 의해 쌍부채를 사용하는 조선의 부채춤과 서로 교류되면서 다채롭게 성장하여왔다.

2012년에 부채춤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상모춤, 널뛰기와 함께 연변풍정 주제 3매의 기념우표에 올라 발행되기도 하였다.

2016년 8월, 연변가무단의 <아리랑꽃> 대형무극에는 국가 1급 안무가인 김희씨에 의하여 보다 화려하고 체계적으로 전승, 발전시킨 부채춤이 한결 이채를 돋구며 무대에 올랐다. 그외에도 최금성씨가 발굴하고 창작한 무형문화재인 탈춤, 한삼춤, 칼춤들이 도입되고 융합됨으로써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경연에서 금상을 따내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였다.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재 편성에 심혈을 기울여

연변가무단의 황홀한 꿈의 무대에서 마음껏 무용재능을 발휘하던 최금성은 1957년 10월에 흔쾌히 조선족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연변예술학교 창립에 보귀한 초석으로 되였다.

무용가 조득현을 부교장으로 조선민간무용학과에 최금성, 조선립체무용학과에 박용원, 발레학과에 최옥주와 리종만으로 초대연변예술학교 무용학과가 창립되였다.

제자의 춤동작을 바로잡아주고 있는 최금성무용가

그들은 본격적으로 중국조선족의 전문무용교육훈련체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제2대 무용가들과 함께 최승희의 ‘기본’, ‘본체’ 등에 기초하여 선후로  《조선족민족무용기본》과  《조선족무용기본동작》 등 우수한 교재들을 출판하였다.

최금성은 무용예술교육가로서 학생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한편 성스러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니고 꾸준히 무용교재를 편찬하는 데 온갖 정력을 몰부었다.

 예술학교 무용반 제자들과 함께(앞줄 왼쪽 첫번째 최금성, 뒤줄 오른쪽 두번째 박용원).

그는  <<부채춤>>,   <<갓춤>>,  <<북춤>>  등 6가지 민속무용교재를 편성하였으며 더불어  <<조선족민간무용동작선>>,  <<부채춤>>   그리고  <<조선족상용무용기본동작선>>(합작) 등 저작들을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동안 쌓아온 풍부한 무용리론과 교수실천 경험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무용동작마다에 상세하게 이름을 붙여가며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무용시범동작 비디오교재 10편을 록화하여 예술학교에서 오늘날까지도 소중한 시청각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민간무용을 발굴, 정리, 창작,안무하는데 투혼

조선족 민간무용에 심후한 감정과 강렬한 애착을 지니고 있던 최금성은 연변예술학교의 배려로 심양에 있는 서울기생학교 출신이며 민간무용 달인인 김용옥선생으로부터 전문적으로 민간무용을 배웠다.

최금성은 군인시절에 몸에 배인 강인한 정신력과 우리 민족예술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지니고 조선민간예술의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고 수많은 민간무용들을 발굴하고 정리하고 창작하고 안무하는 데 투혼하였다.

재미한국인 현대무용가 연변예술학교를 방문(1985년), 오른쪽으로부터 재미무용가 전명숙, 조득현, 최금성, 김민극, 한룡길.

그중에서도 부채춤을 비롯하여 칼춤, 한삼춤, 향발춤, 탈춤, 편고춤, 북춤, 승무 등은 조선족무용사에 길이 빛날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조득현선생의 뒤를 이어 1963년에 최금성이 연변에서 두번째로 창작하고 안무한 무극 <진달래>(김태희 작사, 박우 작곡)는 연변무용가협회로부터 우수상을 수여받았다.

이외에도 3인무 <북춤> 등 그가 창작한 적지 않은 예술무용작품들은 연변음력설야회 등 무대에서 광범한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였으며 다양한 콩쿠르에서 상을 수여받았고 국내는 물론 미국, 한국 등에서도 공연되였다.

조선족무용을 전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

1954년 후반기에 국가문화부에서는 북경무용학교를 창립하기 위하여 발레과, 고전무용과, 중국소수민족과를 설치하고 예술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무용교원들을 양성하게 하였다. 최금성은 중국소수민족과를 담임하고 무용선생님들에게 근 6개월간 조선족무용을 비롯한 소수민족무용들을 정열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흑룡강성민족가무단 성립 초창기에 리길례 단장의 초청으로 최금성은 연변예술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여름, 겨울 방학 때와 공연이 있을 때면 일주일 동안씩 목단강에 달려가서 몇년 동안이나 흑룡강성 생활을 소재로 하는 무용들을 창작하고 안무하면서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다.

1962년에 길림성민족가무단 창립을 앞두고 성문화부에서는 최금성을 안무가로 물색하였다. 조직의 수요는 군인 출신인 최금성에게는 철같은 명령이였다. 그는 7살 되는 큰딸을 남편한테 맡기고 3살 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장춘에 옮겨가서 성가무단 무용부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4년 동안 무용 창작과 안무에 온갖 심혈과 정성을 몰부었다.

남편 백문순음악가와 함께(2000년)

1987년, 정년퇴직한 뒤에도 최금성씨는 학교의 요구에 의하여 안무를 도와주는 한편 소실되여가는 10여편의 보귀한 민속무용문화유산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면서 무려 40년간 연변 민간무용 발전을 위하여 마멸할 수 없는 불후의 공적을 쌓아올렸다.

그는 중국무용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무용학회 회원, 연변무용가협회 리사 등을 지내면서  ‘문화계통선진사업자’,  ‘우수교원’,  ‘로력모범‘,  ’3.8붉은기수‘ 등 영예들을 따냈다.

음악가 아들 및 피아니스트 막내딸 가족들과 함께(2017년)

필자는 최금성무용가님께 “수십년간 무용교육가로 헌신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셨는데 어떤 출중한 제자들이 있는가”고 여쭤보았다.

그는  “기억에 남는 훌륭한 제자들은 있지만 예술학교 무용학과 선생님들이 함께 양성한 제자들”이라며 전쟁의 세례 속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터득한 군인으로서 자신의 명예와 자랑 앞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면서 그는 제자들에 의하여 조선족 민간무용이 날따라 높아가는 대중들의 심미적 요구에 맞게 대를 이어 아름답게 전승되고 발전해 가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맙게도 필자와 련락이 닿은 연변대학예술학원의 한룡길교수님은 “최선생님은 조선족무용계에서 무명영웅이라 할 정도로 겸손한 분으로서 묻혀진 보석”이라고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연변무용예술계에서의 권위적인 평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다.

“최금성무용가는 중국조선족무용 특색의 정립과 지향적인 발전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중국조선족민속무용교육체계 정립의 공신이자 권위자이며 중국조선족무용교육사의 무명영웅, 중국조선족무용 분야의 ‘민속무신’이다。”

/길림신문 미국특파원 리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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