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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을 부인하는 일본 우익의 5대 거짓말

편집/기자: [ 리미연 ] 원고래원: [ 신화사 ] 발표시간: [ 2017-12-13 15:10:17 ] 클릭: [ ]

올해는 남경대학살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80년전의 엄동설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남경을 공격, 점령한 후 방화, 살인, 략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중국 군민 30만명을 살해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본군의 악행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력사는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이 폭행을 치욕의 기둥에 못 박았다. 하지만 일본 국내에는 늘 남경대학살 부인을 노리는 세력들이 있다. 특히 최근년래 일본 정계와 사회 우익화가 격화됨에 따라 남경대학살을 부인하는 언행은 재차 떠들썩거리고 그 수단 또한 보다 다양해졌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억공사 국제자문위원회가 《남경대학살문서》를 평의하는 기간 일본 당국은 회비 납불 금지 등 수단으로 위협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저애했다.

2016년, 일본 문부과학성이 심사결정한 일부 고중 교과서에서는 남경대학살 조난자수를 회피하면서 다만 ‘대량’이라는 서술로 모호하게 처리했다.

올해 년초 일본 APA그룹은 공공연히 산하 련쇄호텔에 남경대학살을 부인하는 서적을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매체는 또한 일본이 의원을 파견하여 카나다 온타리오성 의회가 ‘남경대학살 기념일’을 설립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유세했다고 폭로했다.

일본 당국 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도 남경대학살 력사의 진상에 대해 깊이 감추고 있다. 우익 학자, 정객들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론거’로 황당무계한 론리를 함부로 퍼뜨리고 일부 이른바 의견지도자와 우익 매체는 부채질 하면서 원래 침략력사를 그다지 료해하지 못하는 많은 일본 민줄들로 하여금 거짓을 진실로 믿게 했다.

하지만 일본에도 장기이래 남경대학살 력사 진상 조사와 연구에 진력하고 있는 정의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우익세력이 남경대학살을 부인하는 거짓말과 견결히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론박할 수 없는 사실과 론증으로 일본 우익세력이 조작하고 퍼뜨린 5대 주요 거짓말을 까밝혔다.

첫번째 거짓말: 남경대학살은 전승국이 일본을 보복하기 위해 ‘도꾜심판’에서 날조한 것으로 심판에 참가한 인도 법관은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했다.

일본군 중국 침략 전쟁 력사 학자 모리 마사타카: 도꾜심판에서 남경대학살 생존자 11명이 출정하여 증언했고 미국 목사 마지, 의사 윌, 금릉대학 교수 베이츠 등 ‘난민구(국제안전구)’의 ‘제3자’도 증언을 했다. 출정한 사람들의 증언외에도 많은 증인들의 선서증언 및 ‘난민구’의 자료, 법원의 부검보고, 자선단체의 매장기록, 유태교 랍비의 서신 등이 있었는바 증거가 충분했다.

히토쓰바시대학 력사학 교수 요시다 유타카: 인도 법관 빨이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한 것은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이 패전국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빨도 일본이 점령지에서 전쟁범죄를 범했음을 승인했다. 일본 우익은 빨의 주장을 단장취의하면서 의도적으로 간소화했는데 그 목적은 ‘일본 무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였다.

도꾜심판 중국 검찰관 상철준의 아들이며 상해교통대학 도꾜심판연구쎈터 명예주임인 상륭만은 심판중 남경대학살과 관련된 인증·물증 수량이 많았는데 그중 외국인의 증언이 특히 설복력이 컸다고 말했다.

두번째 거짓말; 남경대학살은 당시 아는 사람이 없었고 중국 국내와 세계 여론도 당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바 모두 후에 날조한 것이다.

모리 마사타카: 당시 남경의 외국 기자는 일본군의 폭행을 목격한 후 즉시 보도를 작성했다. 학살이 시작된 며칠 후 해당 보도가 나왔다. 《뉴욕타임스》, 《시카고데일리뉴스》 등 매체에서 모두 보도한 것이다. 1938년 1월, 세인은 모두 남경대학살의 존재를 알게 되였다. 중국인도 이 상황을 알았다. 1938년 2월, 국제련맹 중국대표 고유균은 국제련맹에서 연설을 발표 시 남경대학살을 언급하면서 전세계가 이 사건을 주목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중국측이 그 전에 이미 구체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측도 도꾜심판 후에야 남경대학살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현재 찾아낸 대량의 자료들은 당시 일본 외무성이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남경에서의 일본군의 폭행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중국측이든 일본측이든 전세계든 모두 남경대학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력사학자이며 도꾜대학 명예교수인 이시이 아키라: 사실상 남경대학살은 당시 남경 시내에 남은 외국매체 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탄을 일으켰다.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 여론이 엄격한 관리와 통제를 받았고 일본 매체는 사건 진상을 완전히 보도하지 않았기에 당시 일본 민중들은 일본군의 잔인한 폭행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경대학살력사 및 국제평화연구원 학자인 호탁연이 최신 발견한 력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국 해군 부장 녹스는 1943년에 이미 대학살에 대한 국제반파쑈 진영의 공동 격분을 표달했으며 남경대학살과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대학살을 병렬시켰다. 이는 남경대학살은 발생된 후 이미 중외에서 공인하는 일본군의 엄중한 폭행으로 되였음을 증명한다.

세번째 거짓말: 당시 남경인구는 다만 20만명이기에 남경대학살 피해자가 30만명이 될 수 없다.

요시다 유타카: 남경시정부가 1937년 11월 23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당시 남경특별시 인구는 약 50만명이였다. 이외 남경 수비 부대에도 약 15만명이 있었다. 때문에 남경 인구가 20만명 밖에 안된다는 것은 확실히 틀린 것이다.

남경대학살 력사학자이며 일본 명심회 회장인 마츠오카 다마키: 이른바 20만명이란 사실 남경 ‘난민구(국제안전구)’의 인구를 가리킨다. 우익분자들은 이 문제를 론할 때 ‘난민구’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모리 마사타카: 당시 시체를 처리한 숭선당과 적만자회의 기록에 따르면 이 두 단체가 처리한 시체만 해도 15만구에 달했다. 대량의 집체학살이 모두 장강변에서 진행되였기에 많은 시체가 강에 버려져 통계할 수 없는 것을 고려하면 최종 피해자수는 30만명에 접근한다.

중국항일전쟁력사학회 부회장인 주성산은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30만명을 학살한 폭행은 극동국제군사재판과 남경 일본전범심판군사법정을 통해 인정된 법정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후에 발견된 여러가지 자료에 따르면 대학살 조난자는 분명 30만명이 넘는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네번째 거짓말: ‘100인 참수 경쟁’은 당시 일본 매체가 조작한 것으로 남경대학살의 례증으로 될 수 없다.

요시다 유타카: 이른바 ‘100인 참수 경쟁’은 최초 《도꾜니치니치신문》(현재의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고 기타 매체도 보도했었다. 내용은 일본군 소위인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타케시가 남경으로 진군하는 도중 누가 먼저 중국인 100명을 참수하는가를 겨룬 것이다. 두 사람은 자금산전역에서 ‘106 대 105’의 결과를 얻었지만 누가 먼저 100명 이상을 참수했는 지를 판단할 수 없었기에 또 ‘150인 참수 경쟁’을 시작했다. 지난 세기 70, 80년대 《아사히신문》 기자 혼다 카즈이치는 자신의 작품에 남경대학살을 기록했는데 그중 ‘100인 참수 경쟁’이 포함됐다. 후날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타케시의 후인들은 《마이니치신문》, 《아사히신문》과 혼다 카즈이치가 선조의 명예를 손상시켰다고 기소했지만 최종 패소했다.

모리 마사타카: 일부 사람들은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타케시의 ‘100인 참수 경쟁’을 전투행위라고 하면서 매체가 과장한 것이지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일본 칼은 100명을 다 참수하지 못하고 망가진다고 떠들어댔다. 혼다 카즈이치와 《마이니치신문》은 (상술 소송에서) 살인은 모두 전쟁중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많은 포로나 붙잡힌 농민들이 반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참수당한 것이기에 100명 이상을 참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고 주장했다. 원고측 변호사인 전임 방위상 이나다 도모미는 남경대학살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정은 원고가 패소한 것으로 판결했다.

마츠오카 다마키: 당시 매체에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도 귀국 후 가족들에게 자신이 ‘전투중 100명 넘게 죽였다’고 직접 말했다. 내가 다년래 중국 침략 일본 로병들을 방문하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은 비록 전투중에서 칼로 중국 군인을 죽였지만 더 많은 상황에서 이른바 ‘전투중 멸적’은 사실 현지 농민들을 붙잡고 ‘칼시험’을 한 잔인한 폭행이였다.

일본 법원이 전범 유가족의 패소를 판결함으로써 침략력사를 뒤집으려는 일본 우익의 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섯번째 거짓말: 사복 차림을 하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중국 군인은 일본군에 반항하는 유격대원으로 일본군이 그들을 살해한 것은 국제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요시다 유타카: 학계는 ‘사복병사’ 설법에 대해 이미 벌써 결론을 내렸다. 당시 일본군은 다만 ‘매서운 눈빛’ 등 이른바 특징에 근거하여 ‘사복병사’를 식별했다. 하지만 당시 군기는 적군이 평민으로 위장했다고 의심되면 군사법정 절차를 거쳐야만 판정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었다.

모리 마사타카: 당시 일부 군복 대신 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일본군의 포악한 징벌을 피하기 위한 것이였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반항능력을 상실하고 일본군의 포로로 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포로의 목숨을 남기지 않고 즉시 사형에 처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장강변에서 학살당했다. 이와 관련된 기록, 증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본은 당시 이미 《헤그공약》에 가입했는데 그중에는 응당 포로에게 인도적 대우를 주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돼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소행은 완전히 이 공약을 위반한 것이였다.

이시이 아키라: 력사자료는 일본군이 당시 유럽과 미국이 관리하는 국제안전구에 뛰여들어 많은 병사와 민간인을 잡아가고 살해했음을 실증할 수 있다. 남경 시내에서 일본군은 많은 병사와 민간인을 무차별로 살해했다. 국제법은 포로와 민간인을 살해하지 못한다고 규정되여있다. 일본은 살해한 사람들은 민간인으로 위장한 사복병사라고 말하는데 이는 완전히 책임을 회피하려는 변명일 따름이다.

주성산은 《헤그공약》에 따르면 당시 중국 군인은 사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무기를 내려놓기만 하면 포로로 간주되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제안전구는 무기를 갖고 진입할 수 없었기에 일본군이 그 곳에서 이른바 ‘사복병사’들을 붙잡고 살해한 것은 완전히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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