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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안해의 밥상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0-25 15:22:52 ] 클릭: [ ]

 ▣ 구호준

아침에 깨여나 주방에 들어가니 아침을 준비하던 안해가 나를 보자 얼굴이 깨여진다.

“어떻게 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어린애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부모 앞에서 무작정 용서를 빌고 있는 그런 표정이다.

“왜?”

프라이팬에서 맛 있게 익어가는 소고기를 보고 다시 안해에게 고개를 돌린다.

“짜.”

안해는 긴 설명보다는 소고기 한점을 집어 내 입에 넣어준다.

한입 가득 고기맛보다도 소금맛이 더 진하다. 하지만 이미 랑패상을 만들어버린 안해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얼굴을 찡그릴 수는 없다.

“뭐 괜찮네.”

평소에 홀로 살면서 음식을 슴슴하게 먹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내 입에는 곰열이 아니라 완전히 소금덩이지만 대답은 여전히 엉뚱하다.

“어떻게 해? 나 미쳤어. 미쳤어.”

안해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안절부절이다.

“저것도 짜.”

안해는 옆에 있는 양배추김치를 가리킨다. 대답 대신 입을 내민다. 고혈압으로 음식의 짠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안해가 짜다고 하면 그건 묻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다. 역시 김치도 소고기를 뺨 친다.

“이젠 어떻게 해?”

깨여나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으면 바로 출근시간이 된다. 다시 뭔가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없다. 아니, 시간이 넉넉하다고 해도 안해의 실수를 굳이 잘못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늘은 물을 밥에 말아먹어야겠네.”

엉뚱한 대답에 일그러졌던 안해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여난다. 밥을 물에 말아먹는다는 말은 들었어도 물을 밥에 말아서 먹는다는 말은 상식적으로나 사전적인 의미로나 잘못된 표현으로만 되여있을 것이니 여직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둘이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굳이 상식이나 론리에 얽매여야 할 리유는 없다. 그냥 서로가 편하고 즐거우면 그것이 상식이고 생활론리가 아닐가?

밥상을 마주하고 다시 눈치를 살피는 안해를 보지 못한 척하고 소고기도 김치도 한가득 넣고 우물거린다. 그러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 내 기색을 보면서 안해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조금씩 가셔지고 있다.

다시 밝아지는 얼굴을 보면서 내가 안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짠 음식도 맛 있게 먹어주는 것 뿐인데 그것마저 고마워하는 안해에게 감사할 뿐이다.

홀로 살아오는 동안 결혼은 늘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결혼은 나이와 무관하게 항상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순수한 감성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결혼은 불행이라고 고집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문학치료강의’를 할 때도 결혼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였다.

“서울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시장에서 남새나 고기를 파는 중학교 졸업생과 결혼할 수 있어요? 친구들이나 가족들 앞에서 쪽 팔려서 못하잖아요? 그러니 자신과 비슷한 학력이나 경제, 혹은 외모와 같은 것을 따지게 되고 그래서 감성까지도 계산되는 것이지요.”

그런 내 사유를 바꿔놓은 것이 안해다.

버려라, 비워라 하는 말들이 요즘 세상에 류행되고 있는 오늘날 비울 것도 버릴 것조차 갖지 못한 내게로 다가와 머물러 주는 안해가 잘못된 내 삶의 방식을 통채로 바꿔놓고 있다. 안해를 보면서 세속에 때묻지 않은 그런 소설 같은 사랑을 넘어서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되였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정의와 명언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그런 상식적이고 공식적인 답보다는 안해를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타인이 만들어낸 답이 아닌 나만의 사랑을 배우면서 살게 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도, 그렇다고 등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곳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 여직 비여있던 둘만의 공간을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는 그런 려정이 어쩌면 내 사랑이 아닐가?

가끔은 실수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면서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임을 즐거워하고 실수와 잘못을 웃음으로 넘기는 그런 여유들로 비여있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사랑이다.

홀로 살던 날들에도 즐거웠다. 홀로만의 즐거움이 있었고 나만의 여유를 즐기면서 살았었다. 나는 남들처럼 외로워서, 고독해서 안해를 만난 것이 아니다. 사랑해서 만났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안해가 나를 사랑하니깐. 살아오는 동안 잘못된 길을 걷기도 하고 멀리 돌고 돌아오면서 인제야 만나기도 했지만 그간 독신을 고집해야 했던 것은 지금 내 안해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였을가?

“넌 나를 위해서 태여난 녀자야.”

안해에게 가끔 자신 있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태여난 녀자를 위해서 나도 태여난 까닭은 아닐가? 밥을 만 물과 함께 반찬을 먹으니 짠맛이 덜해지다가 조금씩 입도 짠맛에 적응해버린다.

사람들은 음식을 입맛에 맞춰서 만든다고 하지만 안해가 만든 짠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에 맞춰서 입맛도 변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평생을 살면서 음식투정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래서 짠 음식을 먹지 못하지만 음식이 짜면 ‘쓰겁다’고 한다던 내 말을 어록처럼 기억하고 있던 안해, 짠 음식도 맛 있게 먹는 나를 보면서 밝아진 안해의 모습을 보며 이젠 오두막 하나라도 안해만이 아닌 우리를 위해서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홀로 살면서 집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았었다. 남들처럼 열심히 모으기만 하면 아빠트 한채라도 살 수 있었지만 내 인상 속에 집이란 의미는 내가 머물지 않으면 그건 너무 비싼 려관이였다. 집에서 사는 날보다 밖에서 살아야 할 날들이 더 많다면 그건 려관과 같은 존재이고 집이 있어 밖에서 살면서도 항상 돌아갈 생각만 한다면 집이 아닌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라고 고집했었다.

하지만 이젠 오두막 하나라도 갖추고 안해가 차려주는 밥상을 마주하고 남은 생을 살고 싶다. 오두막이여서 비가 새면 이영을 할 줄 모르니 그냥 비닐 한쪼각 주어다가 이영 우에 덮어도 안해는 보따리를 싸지는 않으리라.

안해가 만든 짠 음식 앞에서 밥을 물에 말아서 먹는 것도 아니고 물을 밥에 말아먹는 남자라면 어쩌면 비가 새는 집에서 살면서도 아직 빈그릇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지는 않을가?

안해가 차려준 밥상, 그것은 짠 음식이 놓인 밥상이 아니라 안해의 정이 담겨진 밥상이다. 그 밥상 우에 안해와 나의 사랑을 심는다.

안해가 차려주는 밥상, 그 밥상 우에서 사랑도 새롭게 새롭게 년륜을 새겨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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