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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기치 높이 추켜들고 ...정덕영교수 추서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넷 ] 발표시간: [ 2018-06-04 15:45:01 ] 클릭: [ ]

-그는 저명한 중국공산당 사학가, 맑스주의 중국화 연구에서의 중요한 개척자, 창시자

 
정덕영교수
 
정덕영교수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93세 정덕영교수는 일생을 맑스주의 중국화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리론체계, 중국공산당 당사, 모택동사상, 공산국제와 중국혁명의 관계에 대한 연구 사업을 위하여,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탁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 나라 저명한 중국공산당 사학가이고 모택동사상 연구 전문가이며 우리나라 중국공산당 사학과와 맑스주의 중국화 연구에서의 중요한 개척자이며 창시자이다. 그는 길림성의 우수한 공산당원이며 동북사범대학의 명예교수, 박사생 도사이며 원 부교장이였다.

세월의 풍운변환속에서, 긴 인생 려정에서 그의 진리를 추구하는 발걸음은 추호도 흔들림 없이 견고하고 힘찼다.

그는 진리를 수위하는 ‘홍색리론가’이다. 견정하게 맑스주의 신앙을 수립했고 일생을 맑스주의를 연구하고 선전하는 위대한 사업에 바쳤다. 맑스주의 리론에 대한 시대의 부단한 추구 앞에서 그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필을 놓지 않았고 시종 뛰여난 정치적 담략과 거대한 리론적 용기로 질의에 응답했고 시종 진리를 앞으로 전진하는 좌표로 견지했다.

그는 근면, 혁신하는 학자이다. 그는 중국공산당 사학과에서의 한폭의 기치이다. 그는 혁신을 학술연구의 끊임 없는 추구로 삼아 탐구에 몰두하고 완벽함을 추구했다. 67년간의 학술생애에서 그는 40여부의 학술 저작을 출판했고 학술 론문 260여편을 발표했는바 그 가운데서 여러 항목의 연구성과는 학술상의 공백을 메웠으며 해내외 학술계에서 숭고한 성망을 누렸다.

그는 묵묵히 ‘학생농사를 지은’ 원예사이다. 교수1 선에서 그는 인품, 덕학 면에서 타인의 모범이 되였다. 자신이 배운 바, 사고한 바, 연구한 바, 성취한 바를 매 제자들에게 남김없이 가르쳐 주었다. 1986년에 그는 학교책임자 직무에서 물러난후 박사연구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33년간 그는 49명의 박사생을 양성해냈다. 그의 제자 중 다수가 중공당 사학과와 모택동사상 연구령역의 교수, 박사생도사로 되였으며 사회 각계의 간판 인재로 되였다.

그는 품덕이 고상한 세기적인 로인으로서 ‘리상, 근면, 의리, 진취’를 좌우명으로 삼아 신앙과 신념을 인생추구에 융입시켰고 학술연구 및 ‘원예사’생애에 융입시켰으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했다. 90세이후에도 그는 의연히 학술 혁신을 견지해 연구 방향을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에까지 넓혀와 높은 수준의 리론성과를 여러편 발표했다.

진리에 대한 갈구

 
병상에서도 제자들과 학술론문에 관한 의견교류를 지속했다. 

고등학교 맑스주의학원 및 맑스주의 학술연구분야에는 ‘맑스주의를 참답게 학습, 연구, 교수, 신앙해야 하고, 전파, 수호해야 한다(在马言马、懂马信马、传马护马)’는 신조가 있다. 정덕영교수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필생 실천하는 걸로 맑스주의 진리의 위대함을 전석했고 한 맑스주의자의 고상한 지조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정덕영교수가 우리에게 남긴 건 보귀한 진리와 지식 뿐만이 아니라 더욱이는 언제까지라도 후세를 밝혀줄 풍부한 정신적 재부가 있다.

“맑스레닌주의를 접촉해서부터 나는 반드시 진리 측에 서야 한다고 견정불의해졌다!”

진리에 대한 갈구는 정덕영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확고히 하게 했다.

정덕영은 1926년 길림성 연변에서 태여났다. 렬강들이 중국을 침략하고 사처에 전란이 일어나던 년대였다. 소년시절의 정덕영은 선후로 ‘봉천’과 ‘신경’에서 공부했다. 일제의 잔폭한 통치를 목격했으며 이는 정덕영으로 하여금 망국노의 치욕과 고통을 체감하게 했다.

“어떻게 해야만 이 극도로 빈곤하고 약소해진 중국을 구할 수 있을가?”

정덕영의 나젊은 령혼은 늘 자아를 고문했다.

진리의 밝은 빛은 눈부셨다. 1948년 대학을 다니고 있던 정덕영은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해방구로 향해갔고 동북대학(동북사범대학의 전신)2부 단기 훈련반에 가서 학습했다. 거기서 정덕영은 중국공산당에 대해 알게 되였고 중국공산당 간부와 군중이 동심일체로 뭉치고 있음을 보았다. 이는 정덕영에게 심각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회억록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공목(公木)선생은 당시 유명한 시인이였다. 큰 인물이였다. 그가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 대해 소개할 때 구어체로 리론을 말해주는데 진리성이 있으면서도 매우 흡인성이 있어 귀에 , 머리 속에 마음 속에 쏙쏙 들어오게 했다.”

그 때 그들에게 강의 해주던 교사 가운데는 교장 장여심 등도 있었다. 정덕영의 말로 하면 다 문화차원이 매우 높고 수준이 있는 인물이였다는 뜻이였다. 때문에 처음에 맑스주의를 접촉하고 공산당 리론을 접촉할 때부터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자기의 리상과 신념을 견정하게 굳히였다고 한다.

그 단기 훈련반에서 정덕영은 맑스주의 리론에 대해 강렬한 흥취를 가졌다. 그는 목 마른 사람처럼 맑스-레닌주의 경전 저술을 탐독했고 맑스-레닌주의 가운데서 인생 분투 목표가 무엇인지를 찾아냈고 맑스주의 신앙을 견고하게 수립했다.

“신앙은 일단 수립했으면 끝까지 견지해가야 한다. 나는 반드시 진리 측에 선다!”고 그는 말했다.

1949년 정덕영은 동북사범대학 력사계 본과에로 넘어와 학습했으며 1952년에 앞당겨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당시 학교에서는 맑스-레닌주의 4개 과문의 교학사업을 가강하기 위해 새롭게 4개 직속 교연실을 설립했다. 정덕영은 중국혁명사 직속교연실에 분배돼 교학하게 됐는 바 중국공산당 당사 연구와 교학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리상, 근면, 의력, 진취’를 좌우명으로 삼아 고심히 연구하고 혼신을 다해 중국공산당 당사 학습, 연구와 교학 속에 뚫고 들어갔다. 1953년 정덕영은 우수한 표현으로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 조직에 가입했다.

그 때로부터 그는 중국공산당 당사, 모택동사상,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갈라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었고 그 연구사업은 그가 종신토록 분투하는 사업으로 되였다.

정덕영은 사업에 대해 무한히 충성했다.

현실이 복잡하다고 자신의 꿈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리상이 요원하다고 추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진정 맑스주의를 ‘진지하게 학습, 정통하며 확고하게 신앙, 실천에 응용(真学、真懂、真信、真用)’하는 목표를 실현했다.

정덕영은 사업에 대해 무한하게 열애했다.

무릇 그와 접촉해본 이는 다 사업에 대한 그의 열애는 가슴 속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것 임을 수긍하고 그가 순박하고 성실하며 솔직하고 명랑한 사람임을 느끼였다. 그는 시종 학습을 견지했고 조금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매번 그의 저택에 갈 때면 늘 그가 서재에서 독서하고 있었고 그의 식탁에나 책꽂이에나 침대머리에나 어디에나 책이였다고 한다. 그믐날 저녁에도 그는 교연실에 가서 책을 보고 습작했다. 바로 이렇게 그는 수십년을 하루같이 깊이깊이 홍색리론을 탐구하는 해양 속에 빠져 있었다.

정덕영은 교사한테는 “학생들에게 바른 길을 가리켜주아야 하고 바르게 가는 방법, 기교를 가르쳐주어야 하며 실천가운데서의 미혹을 풀어주어야(传道、授业、解惑)하는 것이 3위1체”라며 그 가운데서 ‘전도(传道)’가 첫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늘날의 ‘도(道)’는 바로 ‘사회주의, 애국주의, 집체주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맑스주의 지도이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년간의 교학과 연구에서의 수확을 추호도 남김없이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었고 자신의 당사업에 대한 끈질긴 추구에서의 심득을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어 학생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사람 됨됨이에서 , 사업에서, 학문에서의 진수를 학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경상적으로 제자들에게 업무상에서 자신을 국가의 고급 인재로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정치 상에서도 마땅히 자신을 공산주의 전사로 성장하게 해야 하며 그 어떤 정치 풍랑속에서도 시종 견정한 정치방향을 견지해야 하고 립장을 튼튼히 해야 하며 고상한 공산주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고 일깨워주었다.

그는 강렬한 책임감, 담당의식으로 홍색리론을 선양하는 한번의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학술강연을 다닌 그의 발자취는 중국의 절반강산에 새겨져있다.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을 선전하는 데라면 그는 자신의 년령을 잊고 손에 쥔 일감도 내려놓으며 컨디션이 어떻던 간을 불문하고 무조건 흔쾌히 향해간다. 기층단위의 요청일지라도 그는 종래로 거절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말려도 그는 “이것은 책임이다. 우리 전업이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인데 어찌 미루어버릴 수 있느냐 ”하며 결연히 간다.

다년래 그는 필을 놓은 적 없으며 혁신 연구를 견지하여 가치 있는 저술을 많이 내놓았다. 교재를 편찬하고 전문집을 출판하고 또 이런 리론성과를 통해 맑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을 더 광범하게 전파했다. 개혁개방이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에 관해 정덕영은 많은 새로운 리론을 제기했다. 그의 이런 학술적관점은 중국공산당의 의식형태 건설과 긴밀히 관련됐고 맑스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철학 사회과학 령역에서의 지도적 지위와 긴밀히 관련되며 더욱이는 당의 로선방침을 관철 집행하는 것과 고도로 일치했다.

“그는 한시도 자신이 당원이란 걸 잊지 않았다”

 
학습은 정덕영교수의 일상 생활습관으로 되였으며 그의 한생의 교육, 연구생애에 관통되였다.

“정덕영교수는 당에 무한한 충성을 지니였다. 그는 한시도 자신이 당원이란 걸 잊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늘 한 당원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다”

정덕영의 생의 마지막 몇 년에 줄곧 그의 좌우에서 배동한 그의 박사생 구소일이 스승을 기리며 한 말이다.

정덕영교수의 하나하나의 작은 일들이 그의 제자와 동료들에게서 떠올려진다.

1955년 정덕영교수가 공무로 서안에 출장갔을 때 일이다. 그 는 보고 싶어하던 서안의 명물 대안탑을 출장 기간에 끼운 일요일을 기다려 가보았다. 차에서 내린후 정교수가 처리한 첫번째 일이 당시 4전하는 뻐스표를 찢어버리는 일이였는데 한것은 다른 차표와 섞이지 말도록 아예 처리해버려 단위에 돌아가 보상받을 때 문제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사는 분명하다. 당원은 반드시 엄격히 자기를 요구해야 한다. 함부로 이런 선례를 깨뜨릴수야 없지!”

동북사범대학 정법학원 당위서기 인경은 접때 정덕영교수의 친척이 정덕영교수의 의료보험카드를 리용하여 약을 좀 사려 했다가 정덕영한테 혼났던 일을 떠올린다.

정덕영은 생의 마지막 몇 년은 결장암으로 시달림 받았지만 정법학원의 당지부활동에 웬간해서는 빠지지 않았다. 그의 신체정황을 고려하여 많은 동료들은 그 더러 활동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며 제자를 대신 보내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당지부활동에 참가하는건 한 당원의 기본 직책이다”며 견결히 동의하지 않았다.

정법학원의 공청단서기 길길은 “생명의 마지막순간에도 병상에서의 정교수 마음속에는 오직 당과 과학연구사업을 담고 있었다. 문안 오는 제자들한테 ‘초심을 잊지 말고……’하고 간곡히 가르쳤다”고 한다.

한사람의 일생은 짧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추구는 종착역이 없는 것이다. 정덕영은 맑스주의의 견정한 신앙자이며 맑스주의리론의 전파자이기도 하다. 시종 맑스주의 신앙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당을 따랐으며 한생을 궁하게 살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시종 맑스주의신앙의 빛살이 눈부셨다. 

/편역  김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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