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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40년] 심수의 기적으로 본 개혁개방 40년 (2)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신화넷 ] 발표시간: [ 2018-05-28 12:04:16 ] 클릭: [ ]

장엄한 려정- “심수의 속도”가 “중국의 눈높이”가 되기까지 남해바다 가에서 땅을 차고 일떠선 이 도시는 끊임없이 시대적 전기를 써 냈으며 개방개방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업의 새 국면을 개척하는데 끝 없는 동력을 실어주었다.

밤장막이 내리기 시작한 심남(深南)거리에서 차를 달리노라니 평안국제금융중심이며 초상은행총부, 텐센트빌딩 등 고층건물들이 수풀을 이루고 오색등불빛이 현란한데 도시전체가 마치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아름다운 지평을 그리고 있었다.

25.6키로메터에 달하는 이 큰 거리는 심수의 좌표축으로서 건설려정도 이 도시발전의 시간축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 첫 단계 수건을 시작할 때 심남거리의 전체 길이는 2.1키로메터이고 너비는 두 대의 차량이 나란히 달릴 수 있는 정도였으나 당시는 이 특별구에서 가장 큰 거리였다.

1982년부터 1984년말에 이르러 제1차 확건공사가 끝나면서 이 거리는 50메터 너비로 넓어졌다.

1987년 거리중간에 고가교(高架桥) 철도를 부설하면서 6.8키로메터로 늘어난 심남거리를 두고 심수사람들은 “10리거리”라 자랑스럽게 불렀다.

1992년 심남거리는 135메터 너비로 확장되였다.

1997년 향항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 해 거리 량켠에 관목, 교목과 같은 수백 종의 식물을 심어 원림경관을 이루어놓았다.

2018년 경관조명등 빛이 깊은 밤에도 울긋불긋 심남거리를 명멸하며 감동의 매력을 과시한다.

이 거리는 심수의 영광스런 꿈을 견증하며 심수 나아가 중국의 개혁개방의 길은 갈수록 광활함을 견증하고 있다---

“전해심항청년의꿈현장”(前海深港青年梦工场) 에서 창업하고 있는 장룡화는 3주 내에 영업집조를 받았고 향항에 총부를 두고 있다는 리유로 향항돈 1000만원을 융자받았다. 장룡화에게 있어서 이곳은 창업혁신분위기가 짙고 개혁의 발걸음을 다그치며 창업잠재력을 배로 키워주는 리상적인 고장이였다.

심수는 일찍 “3일에 층집 한층” 이라는 “심수속도”로 전국에 알려졌다면 보다 높은 질적 발전을 추구하면서 일으키는 혁신적 활력은 날이 갈수록 이 도시를 세계에로 널리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1987년 12월 1일, 심수에서 중국의 첫 토지경매 망치소리가 울렸다. 신화사 발 (심수박물관사진)

사람들이 심수를 두고 논할 때면 자재와 설비, 기술을 들여다 국내에서 완성하여 무역을 보상하는 ‘3래 1보'나 주문자의 상표를 붙이는 상품가공(贴牌加工) 또는 모방제조(模拟仿制)와 같은 것은 언녕 옛말이 된지 오래다. 오늘날 매 평방키로메터에 국가급고신기술기업이 5, 6개소가 있고 매일 평균 51건에 달하는 발명특허권을 받으며 전 사회적으로 연구개발투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를 초과한다…

당전 중국경제는 고속장성단계에서 고량질발전단계에로 전이하였다. 심수는 표지성 혁신에 시동을 걸고 중국의 경제전환을 승급시키는 서술에 최신주해를 달고 있다.

심수는 어찌하여 혁신도시로 되였을가?

한 사람은 이런 비유를 한 적 있다. 혁신은 마치 활짝 핀 아름다운 꽃과 같다고. 아름다운 꽃은 충족한 해볕과 이슬과 비, 적당한 습도와 온도 등 환경이 마련되여야 한다. 발전환경을 마련한다는 것도 결국 체제와 기제에 대한 개혁과 리념에 대한 갱신이 따라가야 한다.

초상국 사구공업구가 설립되던 초기, 마이크로파통신을 제기하면 “간이 배밖에 나왔다”고 질책받았고 종업원들에게 배당되는 식량이 모자라 외화로 식량을 구입하여 저장하자고 하면 “기상천외한 꿈”이라고 비난 받았다.

“시간은 곧 금전이고 효익은 곧 생명이다.” 1981년 말, 이 거폭의 표어가 사구공업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에 나붙었다. 이 구호는 또 국경 35주년 이동식무대차량에 나붙어 신주대지에 전해졌으며 억만 중국인들이 높이 웨쳤다.

하늘땅을 진감하듯 돌진하고 용감히 앞장서 돌파를 추구하고 특별구의 “특”자를 앞세워 과감히 부딪치며 개척한다---

처음으로 평균주의 “큰가마밥” 로임제도를 타파하고 토지경매를 붙이는 “첫 망치소리” 울리고 첫 외화조절중심이 설립되고 첫 기업그룹에서 꾸리는 은행이 문을 열고 첫 주식제보험기업소가 생겨나고….근 40년간 심수에서 국내적으로 1,000여개의 “국내 제1”이 탄생되였다.

창립초기단계에 심수는 과감히 솔선적으로 전반 시장화 개혁을 탐색하였고 수레를 끄는 황소정신으로 얼키고 설킨 낡은 체제의 속박을 풀어헤쳐나왔다. 1985년 말, 심수의 공업총생산액은 1979년의 6061만원으로부터 24.12억원으로 신속히 장성하였으며 아울러 전국에 리념과 경험을 “수출”하였다.

솔선적으로 이끌어가며 주동을 쟁취한 개혁정신을 일일이 렬거해보면 2000년에는 가공무역으로부터 고신기술로 전환하였고 2008년에는 생물기술, 신에너지, 네트워크 등 전략성 신흥산업을, 2009년에는 신형의 저장처리기술과 신재료 등 제2기 전략성 신흥산업을 배치하였고 2013년에는 생명건강과 착용가능설비 (可穿戴设备,웨어러블기기) 등 미래산업을 육성하였다...

심수과학기술대강혁신총부에서 민용무인기 발명자 왕도(중)가 연구개발자들과 토론하고 있는 장면

“개혁개방 정신이 없거나 과감하게 개척해보려는 용기가 없으면 그리고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신이 없으면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중국은 근본 세계 제2대 경제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올해 90세를 넘은 전임 심수 시위서기 리호가 일찍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장화를 향도로 하는 것은 심수나 중국의 경제체제개혁의 신조이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길로 활개치며 나아갈 수 있는 심오한 비밀로 된다.

지난세기 80년대말, 심수는 이미 외향형경제구도를 초보적으로 형성하였다. 1987년 심수의 수출총액은 전국 도시 중에서 제3위를 차지했고 1988년에는 제2위로 뛰여올랐으며 1993년부터는 심수의 수출입무역총액이 련속 전국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1992년 10월 당의 14차 당대회에서는 중국의 경제체제개혁의 목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심수는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의 기본구도를 건립하고 “외자도입”과 “해외투자”를 서로 결합하여 대외개방의 수준을 한걸음 제고시켰다...

당의 18차당대회이후 2013년 심수는 전국적으로 처음 상사제도(商事制度, 법인등록제도) 개혁을 진행하였다. 개혁을 실시한 첫 한 두해 사이에 심수의 법인등록주체 총량은 100만세대도 되지 않았으나 그뒤로 급속히 늘어나 215만세대로 되였으며 증가된 수는 개혁개방 전 30년 총량을 훨씬 초월하였다. 이리하여 이 상사제도개혁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였고 혁신창업의 시장활력은 전례 없이 활기를 띄였다.

개혁을 추진할수록 혁신은 끝없이 진척되였다.

2018년 2월, 심수에서는 또 비즈니스환경개혁 “20조목”을 출범하였다. 싱가폴이나 향항 등 발달한 국가나 지역에 견주고 세계은행의 비즈니스환경평가체계를 참조하였는데 그 중 126개 정책은 대개 강유력한 개혁을 거쳐 우수한 비즈니스환경을 마련하였다.

드넓은 흉금으로 국제와 접목하고 세계를 포옹하였으며 심수는 향항과 이웃하고 있는 지역적 우세를 발휘하여 솔선적으로 문을 열고 건설을 진행하였는바 “1대일로”와 자유무역시험구, 광동, 향항, 오문, 대만구 건설 등 국가전략기회를 틀어쥐고 개방의 대문을 점점 활짝 열어갔으며 전 지구적 자원을 모아 활용하였다.

“심수의 토지자원은 제한이 크고 담수도 사들이며 광산자원도 없고 고등학교도 적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한 주요 추동력은 바로 개혁개방으로서 개방은 심수의 최대자원이고 최대연성환경이며 개방은 자석처럼 모든 자원을 흡인해들였다.” 심수시 사지(史志)판공실 양립훈은 아주 감회깊게 이야기하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대량의 귀국인재들은 심수에서 혁신창업을 벌리고 있다—미국서부 듀크대학, 영국 옥스포드대학 등 유명한 대학에서 귀국한 박사들로 구성된 광계(光启)그룹이 목전 메타물질분야(超材料领域) 에서의 특허권은 압도적인 우세를 갖고 있으며 신청량은 이 분야의 신청량의 86%를 차지한다.

심수 본토에서 양성해낸 기업들도 우후죽순처럼 성장하고 있다—1999년 심수에서 열린 첫기의 고신과학기술성과교역회에서 28세나는 마화등은 220만딸라에 달하는 융자금을 받았다. 이리하여 텐센트회사에서는 끊임없는 비약을 가져와 2012년 전 년에 걸쳐 438억원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고 2017년에는 2377억원, 2018년에는 위쳇사용호가 전 지구적으로 10억명을 돌파하였다.

2016년 3월 5일, 임정비는 심수의 화웨이총부에서 신화사기자의 취재를 접수하였다.

화웨이(华为) 창시인 임정비는 당초 심수를 선택하게 된 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87년 이 곳에서 출범한 문건에 민영기업재산권에 대해 명백히 밝혔는데 이 문건이 없으면 화웨이를 창립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임정비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화웨이총부기지는 영원히 심수일것이라고 한다. 그가 보기에는 나라에서는 더욱 개방을 확대할 것이고 기업소는 국제화환경에서 공평경쟁을 벌리고 법치화, 시장화의 길로 나아가야 만이 기업소의 리상과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고 한다.

시장이 있으면 꿈은 현실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심수는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국제도시로서 전 지구적으로 세번째로 되는 컨테이너항과 아세아의 가장 큰 륙로항구, 중국의 5대 항공항의 하나를 갖고 있다. 또한 화웨이, 초상, 평안, 텐센트, 만과, 정위, 항대 등 세계 500강 기업소중의 7개소를 갖고 있으면서 세계 500강에 든 200여개의 기업소를 끌여들여 이미 투자협의를 보았다. 2017년 신흥산업이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는 50%에 달했으며 혁신은 경제발전의 가장 큰 동력으로 되였다.

개혁개방은 강대한 내심적 동력을 키워주었는바 인민들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충분히 동원하였으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는데 끝없는 동력을 실어주었다.

심수가 발전해온 매 걸음마다에는 한세대 또 한세대의 특별구 건설자들의 심혈이 어려있다.

1982년 심수 최초의 향항 상인 독자기업인 카이다(凯达)완구공장에서 로동자 모집을 하자 정연평 등 몇백 명에 달하는 나젊은 처녀들이 분분히 소관, 산두 등지로부터 사구공업구로 모여와 중국의 제1대 녀성 로무자로 되였다. 1989년 100만명에 달하는 민공들이 남으로 밀려가 심수는 외래 로무자들이 가장 일찍, 가장 많이 모여든 도시로 되였다. 매현에서 온 녀성 로무자 안자는 1992년에 중국의 첫 농민공사실을 다룬 실화소설 “청춘역전”을 써 심수의 들끓는 농민공력사의 한 단락을 기록하였다.

“나는 당신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립니다.” 2007년 정연평 등 카이다 자매들이 사구공업구의 원 당위서기 원경(袁庚)을 찾아뵈였을 때 90세에 달하는 이 로인분이 모자를 벗어들며 제1대 녀성로무자들에게 허리 굽혀 특별구건설자들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였다.

복건성 복청에서 온 진화서는 심수의 한 공장에서 농민공으로 일하며 “변소 청소 외에는 못해본 일이 없는”사람이다.1993년 그는 기회를 다잡고 기업소를 세웠다. 그때 21명 로동자를 모집하였는데 지금은 1500여명에 달하는 로동자가 있으며 제품은 50여개 나라와 지구의 유명기업소들에 수출된다. 그는 “전국로동모범”칭호를 수여 받기도 하였다.

정연평이나 진화서와 마찬가지로 심수의 많은 로일대 건설자들과 외래 로동자들은 평생을 두고 당년의 그 세월을 잊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심수를 개변시켰고 심수는 우리를 개변시켰습니다.”

건설자들의 기여를 심수는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1984년 심수 시위 대문 앞에 심수의 개척자들을 기리기 위한 “유자소” (孺子牛)동상이 세워졌다. 2008년 심수에서는 또 “로무자박물관”(劳务工) 도 설립하였다.

1999년에 사직하고 유화창작에 종사하는 사비(谢非)는 심수 대분촌에 온 뒤 몇 년 후에 특수인재로 초빙되여 심수에 호적을 붙이고 로무자로부터 심수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심수의 변천을 유화로 그려내면서 개혁개방 40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 도시의 변화를 그려내지만 이 역시 저의 생활”이라고 말하였다.

2017년 7월 13일, 사업일군아 심수의 중국국가유전자고에서 유전자측험의기로 측험을 하고있는 장면.

편역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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