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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처럼 무한한 인생을 살아온 ‘천안(天眼)'지부- 남인동

편집/기자: [ 유경봉 홍옥 ] 원고래원: [ 신화넷 ] 발표시간: [ 2017-09-29 13:37:16 ] 클릭: [ ]

‘천안(天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과학자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24년간의 8,000여개 나날을 오직 하나의 꿈을 향해 달려온 남인동. 500메터 구경구면전파망원경(口径球面射电望远鏡)의 수석과학자이며 총공정사인 그는 온갖 정력을 세계 천문 사상의 새로운 높이를 새기는 데 몰부었다.

9월 25일은 ‘천안’이 락성, 가동된 지 첫돐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바로 10일전에 남인동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집착’ —‘천안’을 위해 일생을 살아오다

“‘천안’의 건설 대상은 남인동 때문에 태여난듯 20여년간 남인동은 이를 위해 인생을 불태웠다.”

고요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남인동은 “우리는 누구인가? 어데서 왔는가? 망망한 우주 속에 있는 우리는 정말 고독할가?”고 수없이 물어왔다.

미지의 우주 비밀을 탐색하는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속 꿈이다. 남인동은 일생 동안 이 꿈을 향해 달려왔다.

자그마한 키에 팔자수염, 청바지차림의 남인동은 언제나 왕성한 정신력을 갖고 있었으며 ‘특별한 패기’가 있었다.

2년전 70세 나이에 남인동은 페암진단을 받았다. 수술 뒤에 가족들은 교외에서 꽃이나 키우며 휴양하도록 했다.

남인동의 학생이자 국가천문대 연구원인 소언이 그의 병문안을 갔다. “이제야 한가하게 보내게 됐네요.” 하고 위안하자 입담 좋은 남인동은 한참 묵묵부답이더니 “ 감옥에 있는 것 같네” 라고 한마디 던졌다.

24년전 일본 도꾜에서 있은 국제무선전과학련맹대회에서 과학자들은 세계 전파환경이 계속 악화되기전에 새세대 전파망원경을 건설해 대기권 밖에서 오는 소식을 더 많이 접수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 때 남인동은 우리도 건설하자고 제기했다.

과거 일본 국립천문대에서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남인동은 세계 급별의 과학연구 조건과 로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의연히 귀국을 선택했다.

자리 선정, 론증, 립항, 건설…어느 한가지도 쉬운 게 없어

 
공사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는 남인동

귀주성에 카스트저지대가 많아 가격대 성능 비례가 높은 ‘천안’대 자리를 고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남인동은 귀주로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후로 한번 또 한번,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귀주 평당현 부현장이였던 왕좌배가 망원경 건설지 선정을 책임졌다. 그는 그 때 처음 ‘천문학자’를 보았고 고생을 밥 먹 듯하는 과학자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천안’ 건설은 여러 분야와 관련되는 대과학공정이다. 천문학, 력학, 기계, 구조, 전자학, 측량 및 통제…지면설계에서 건설운행까지 10만 8,000키로메터 떨어졌다.

‘천안’방안을 심사할 때였다. 암토공정을 모르는 남인동은 1개월의 품을 들여 암토공정 관련 기술을 배우는 데 몰두했다.

70세 나이에도 남인동은 공사장에서 뛰여다녔다. 중국전자과학기술그룹회사 제54연구소의 형성휘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기술자가 잘못 측량해 리벳(地铆) 오차가 생길가 걱정된 남인동은 식사하다 말고 공사장에 달려간 적도 있다.”고 당시를 회억했다.

애당초 ‘천안’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종국에 ‘천안’은 나라의 자랑으로 되였다.

‘천안’은 얼핏 보기엔 큰 ‘가마솥’ 같지만 사실은 세계에서 제일 크고 제일 령민한 단구경 전파망원경으로서 수억광년 밖의 전자기파 신호를 접수할 수 있다.

“20년 동안 그는 이 한가지 일만 해왔다.” 남인동이 병으로 사망한 소식이 전해지자 국가천문대 대장 엄준은 방안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천안’항목은 남인동을 위해 태여났고 남인동은 ‘천안’항목을 위해 인생의 최후 20여년을 바쳤다.

‘열광’ — 세계 유일의 항목을 완수하다

귀주성의 산속에 둘러싸여 우뚝 선 ‘천안'

“남인동이 보기에 중국에는 이런 망원경이 필요했고 그는 이 책임을 맡았으며 일종의 사명감이 생겨났다.”

미친자는 진보하고 발전한다.

‘천안’은 어찌 보면 대담하다 못해 다소 예상치도 못할 계획이였다. 왜냐 하면 지난 세기 90년대초, 중국에서 제일 큰 전파망원경의 구경은 30메터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경이 500메터나 되는 중국의 ‘천안’은 미국지구외계문명연구소의 ‘봉황’계획에 비해 태양성 순시목표를 최소 5배 확대할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항목으로서 천문학 연구 뿐만 아니라 인류, 자연과 우주의 유구한 비밀을 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보기에 이는 ‘공중루각’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에서 왜 할 수 없단 말인가?” 남인동은 ‘광언’ 을 내뱉었다.

그가 귀가 닳도록 외우는 하늘꿈―중국 ‘천안’의 영어명 략자FAST는 ‘빠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천안’은 방대한 계통공정으로서 매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가지 의견을 제기하면 남인동은 일일이 결책을 지어야 했다.

어느 절차에서든 그를 속여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수석과학자’와 ‘총공정사’일뿐더러 ‘전술형의 늙은 로동자’이기도 했다. 남인동은 매개 세절마다 전부 100%의 긍정적인 결과를 원했는바 만약 해결되지 못하면 줄곧 지켜보았고 그 어떤 하자도 용납하지 않았다.

2010년, 네트워크 케블의 피로문제로 인해 ‘천안’은 재난적인 위험을 겪게 되였다. 65세의 남인동은 밥을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날마다 현장에서 기술일군들과 소통했다. ‘천안’의 공예와 재료에 대한 요구는 현재 국가표준의 20배 이상에 달했는바 현재로서는 의거할 기술이 없었다. 남인동은 친히 현장에 나서서 700여일 동안 밤낮없이 일하면서 근 100차의 실패와 좌절을 거쳐 문제를 해결했다.

이 세계 유일의 항목을 위해 남인동은 줄곧 자기와 싸웠다.

 
 
‘끈기’ — 미지세계에 대한 영원한 탐구

남인동은 뼈속으로부터 거친 끈기를 갖고 있어 하고 싶은 일은 끝을 보고야 말았다.

2014년, ‘천안’ 반사면 단원을 리프팅(吊装)하게 되였는데 누구도 69세 고령의 남인동이 첫 사람으로 ‘소비인’ 유인탑승 시험에 몸소 참가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 시험은 간이장치로 사람을 들어올려서 6메터 높이의 시험 노드접시(节点盘)에 보내는 것이였다. 고공에서 발을 디딜 자리가 없이 전부 수동 조작해야 하는데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고공에서 내려올 때마다 남인동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번마다 시험과정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몇개씩 발견해내군 했다.

“그는 모험을 즐긴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을 앞장서 하는 끈기가 없었더라면 ‘천안’항목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엄준은 말한다.

남인동은 ‘천안’건설은 경제리익의 추동하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인류의 창조에 대한 충동과 탐색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과학탐색에서 공리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아야 하며 일단 착수하게 되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학생들을 일깨워주었다.

남인동은 기실 어릴 때부터 ‘비상’함을 보였다. 길림성 료원시에서 태여난 그는 길림성 대학입시에서 리과장원으로 청화대학 무선전학부에 입학한 우등생이였다. 창공을 바라보기 좋아하는 그는 사업에 참가한 지 10년이 넘은 후 ‘무심코’ 중국과학원 연구생 시험을 쳤는데 그 뒤로 천문령역에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였다.

‘진심’—그는 산속에 사는 ‘촌민’ 같았다

피곤기가 어린 거친 피부의 얼굴, 여름에는 T셔츠에 팬츠바람인 이 과학자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대하군 하였다.

‘천안’ 궤원(馈源) 지탱탑 시공 기간, 남인동은 운남의 빈곤 산간에서 온 시공로동자들의 가정이 모두 곤난하다는 말을 듣고 ‘천안’공정 현장의 공정사 뢰정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어 그더러 로동자들의 키, 허리둘레 등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남인동은 두번째로 시공현장에 갈 때 큰 트렁크를 하나 들고 갔다. 그는 뢰정을 불러 트렁크를 들고 로동자들의 숙소에 찾아갔다. 트렁크를 여니 전부 로동자들의 몸에 맞춰 산 T셔츠요, 바지요, 신이였다.

처음 대요당에 갔을 때 남인동은 람루한 옷차림이지만 해맑은 얼굴의 학생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북경에 돌아온 그는 현의 간부인 장지용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열어보니 봉투 안에 돈 500원이 들어있었다. 남선생은 나에게 그 돈을 카로소학교의 제일 곤난한 학생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했다. 그는 4, 5년 부쳐왔는데 지원받은 학생이 7, 8명 된다.”고 장지용이 말했다.

2017년 4월말, 남인동은 병세가 악화되여 인생의 역계시 단계에 들어섰다.

발목수술을 받은 감환겸은 갑자기 위문품을 들고 병실에 나타난 남인동부부를 보고 놀랍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사생지간의 영별이 될 줄이야!

박식하고 관점을 과감히 발표하는 남인동은 국제상에서도 친구가 여럿 있다. 매번 만날 때마다 그는 친구들의 손을 꼭 잡아주거나 포옹해주었다. 한 로과학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특별히 휠체어에 앉아 중국으로 날아와 남인동을 문안하고 가기도 했다.

원사도 아니고 그 어떤 대상도 받아보지 못한 남인동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가 세상을 뜬 후 그의 가족들은 국가천문대에 “장례를 간단히 치르고 추도식을 진행 말라”는 그의 유언을 전달하였다.

‘천안’, 이것이 바로 그가 남긴 유산이였다.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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