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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71]곡절 많은 배움의 길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1-16 11:21:18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1)

◇한해동(장춘)

필자 한해동 

벌써 80고개를 훨씬 넘은 나는 늘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게 된다. 후회되는 일도 많고 자랑스런 일도 적지 않다. 인생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도 같아 장애물에 부딪쳐도 멈추지 않고 에돌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끝내 머나먼 큰 바다에로 이르게 된다.

내가 16세(1948년) 되던 해, 눈강성(嫩江省, 후에 송강성과 합쳐 흑룡강성으로 됨)철려현(지금의 철력현)에 처음으로 조선족중학교가 설립되였다. 이 학교는 원래 수하현 민주련맹 주임이였던 나의 형님이 각 현의 민주련맹과 련계를 가지고 주비위원회 주임 책임을 지고 정부의 지지를 받아 해방전 철려 일본개척단이 버리고 간 집을 장소로 조선족중학교(수화조선족중학교 전신)를 건립하기로 결정한 것이였다. 그러나 형님은 당시 공작대와의 분기로 터무니 없는 루명을 쓰고 타격을 받아 사업터에서 물러났다. 하여 나는 일일여삼추로 기다리던 중학교에 입학자격을 가질 수 없게 되였다. 나는 너무도 억울하여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

여러 지방의 학생들은 희망과 희열에 넘쳐 학교로 떠나는데 나는 년로하신 부모를 비롯한 온 가정의 유일한 로동력으로서 간단한 이불짐을 지고 어른들을 따라 해방전에 일본놈들이 개척하다 버린 황지로 된 태평촌 재개척 일터에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호랑강 기슭에 서툴게 지은 막사에 도착하고 보니 잠자리는 삿자리 밑에 벼짚을 깐 것이고 천막 가운데 훨훨 타는 장작불은 유일한 난방 설비였다. 수십명 어른들과 동침 동식하고 령하 30도 되는 엄한 속에서 로동에 들어섰다.

처음으로 맡겨진 일은 강물을 논밭에 끌어오는 일이였다. 땅땅 얼어붙은 강바닥에 구멍을 뚫고 4메터 되는 말뚝을 땅에 내리박는 일이였다. 나무다리를 세우고 ‘로라베아링’(滚柱轴承)을 달고 천근이 넘는 ‘망게’(쇠몽치)에 바줄을 걸고 올렸다 내리쳐 말목을 땅에 내리박는 일이다.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배우는 일이였다. 지휘자가 “천근 망게는 공중에 놀고” 하고 타령을 하면 량쪽에 선 사람들이 “어이여차하!” 라고 소리치면서 바줄을 당겼다 놓으면 쇠몽치가 말목을 내리친다. 계속하여 부르는 타령, “열두자 말목은 요왕구가네”, “어이여차하!” 웨치는 소리는 잠에 들고 있던 무인지경의 벌판을 깨운다.

며칠 후 이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수문(闸门) 건설이다. 기술이 없는 나는 곡괭이로 언 땅 파기, 말목 나르기, 지게를 지고 흙과 모래 나르기, 가래장부를 쥐고 도랑 치는 일… 끝이 없었다. 폭신한 손바닥이 갈라지고 때로는 피까지 흘리는 형편이다. 그러나 나는 소리없이 어른들과 못지 않게 일하였다. 강물이 도랑에 흘러들 때까지 일은 계속되였다.

이어서 농사일은 너무도 힘들었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꼭 중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대학까지 갈 것이라고 희망의 꿈을 꾸었다. 어느 하루 논김을 맬 때 우연히 《연변일보》에 실린 상지 중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를 보게 되였다.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려드리고 응시할 의도를 전했다. 아버지는 “지금은 농촌에서 제일 바쁜 때이고 너의 형은 집을 짓느라고 바삐 도는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냐.” 고 말씀하시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그러면서도 막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버지는 집에 있던 이불솜을 지고 오래동안 귀중히 보존했던 수정안경을 가지고 도보로 60리나 되는 수화 거리에 가져다 팔아 나에게 약소하지만 매우 보귀한 돈을 쥐여주었다. 나는 너무도 감동되였다. 3일 후, “형님 나는 중학교 시험 치러 갑니다.” 하고 집짓기에 바삐 돌고 있는 형님에게 말했지만 형님은 불쾌한 낯으로 대답도 없었다. 나는 리해하면서도 서운했다. 이를 악물고 어머니가 간단히 차려준 이불과 두 형님이 남겨놓은 낡은 홑바지를 싸서 짊어지고 해방 초기 매부가 일본군 창고에서 주어온 해진 저고리를 집어입고 학교 가는 길에 들어섰다

8월 중순 상지중학교 교문에 도착하니 기쁘기도 하고 마음은 설레였다. 농사일로 책도 만져보지 못하였는데 1학년 시험을 치는가 혹은 2학년 시험을 치는가고 망설이다가 소학교 졸업 때 우등생이였던 기초를 믿고 대담하게 2학년 시험에 참가했다. 며칠 후 학교 게시판에 합격자의 명단을 공포했다. 나는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자기 이름을 찾고 있는데 당시 3학년 학생인 고향 친구 장문완이 내 이름을 먼저 발견하고 뒤에 와서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과연 내 이름이 눈앞에 나타나자 너무도 흥분되여 장문완이를 끌어안고 눈물이 북받쳤다. 이것은 내 출생 후 그 때까지 평생 잊지 못할 제일 기뻤던 일이였다. 당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웠다. “아버지 어머니의 덕분으로 중학생이 되였다고 기뻐하십시오!”. 나는 엄동설한에 솜옷도 못 입는 처지였으나 유쾌한 심정으로 학습에 몰두하였다.

새 학기에 학교에 들어서니 학기가 변동되여 2학년을 반년 더 연기하게 되였다. 하루속히 초중학업을 마치기 위해 담임선생이 말리는 것도 불구하고 수하중학교에 전학하고 3학년에 편입되여 1949년 12월에 졸업하게 되니 초중 3학년 과정을 일년 반 앞당겨 졸업하였다.

1953년 영광스럽게 입당하고 1954년에는 유일한 조선족 교원으로서 현 모범교사의 영예를 안았다. 교육사업은 후대를 배양하는 신성한 사업이다. 역시 내가 매우 사랑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나는 더 배워 대학까지 가겠다는 결심으로 진학의 길을 찾았다.

모교의 채덕균 교장을 찾아 고중에 가서 공부할 의도를 전했다. 채교장선생님은 “너의 학생과 함께 공부하고 너의 동기생이 선생인데 어떻에 학생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배움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채교장선생님은 전례 없는 일이였기에 성교육청 청장에게 사실을 반영하니 청장께서는 배우겠다는 청년은 지지해야 한다고 답복을 주었다.

현교육국에서는 나를 성교육학원에 보내여 진수시키기로 결정했다면서 말리는 것을 직접 고중 3학년 시험을 치고 합격되여 공부하게 되였다. 학생들은 나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극히 존경했다. 나는 너희들이 동창이라고 대답하였다. 나에 동기 동창인 리찬우를 남의 앞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머리를 숙이고 공부했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시험 전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페결핵’으로 진단받았다. 시험 자격도 못 받았고 병까지 걸렸으니 락심하고 비관 속에서 앞길이 막막했다.

몇달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휴양하게 되였다. 이 때 마침 현공안국에서 근무하는 한족 친구 왕청해가 나를 공안국에 소개하여 공안사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수화현은 잡거지구라 조선족으로서 현정부 기관에서 사업하는 것은 마치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친구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는 일이였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가서 더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한편으로 사업에 충성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책을 놓지 않고 대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령도에서는 나의 사업의 책임심과 학습정신을 긍정하였다.

중국인민대학 법률학부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필자(오른쪽)

1958년 대학에서 추천생을 접수하는 기회에 나를 중국인민대학 법률학부에 추천받았다. 학교에서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 정식으로 입학통지서를 나에게 보내왔다. 통지를 받게 된 나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중점대학에 입학하였으니 하늘에 날아갈듯한 기분으로 기쁨 속에서 너무도 격동되였다. 이것이 나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행운이였다. 이 행운은 단위의 관심과 지지와 갈라놓을 수 없다. 나는 령도의 은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어머니도 기뻐서 아버지 앞에서 둥실둥실 춤을 추시며 즐거워하시였다. 소식을 알게 된 채덕균선생님, 학급담임 김재현선생님 모두 “대학에 가겠다고 애쓰더니 참 잘되였다.”라고 고무하면서 기뻐하였다.

희망에 넘쳐 처음으로 북경행 렬차를 타고 북경 전문역(前门站)에 도착하였다. 상급생들의 영접을 받고 뻐스로 천안문 앞을 지나면서 너무도 흥분되였다… 흥분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신체검사가 걱정되였다. 학교 병원에 가서 범의 굴로 들어가는 위구심으로 ‘X광’실에 들어섰다. 다른 학생들은 무사히 통과되고 나만 남겨졌다. 의사는 나의 페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나는 뛰는 가슴을 눅잦히며 종래로 아무런 병도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의사선생님께 대학은 나의 최대의 희망인데 수천리 먼곳에서 온 나를 동정하여 봐달라고 사정하였다. 의사선생님은 나를 동정하면서 ‘혈침(血沉)을 검사하고 나서 큰 문제가 없으니 먼저 등교하라고 통과시켰다. 매우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나는 정식으로 대학생활을 하게 되였다.

긴장하고도 유쾌한 환경 속에서 나는 배움에 노력하였고 각종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나는 간부 신분의 학생으로서 국가 보조를 받게 되였다. 많지 않은 보조금에서 절약 또 절약하여 부모님께 적은 돈을 보내면서 매우 검박한 생활을 해야 했으나 늘 행복감을 느끼면서 배움을 다그쳤다.

겨울방학에 전지달(陈志达) 국장을 비롯한 령도들과 친구들을 찾아보았다. 모두 매우 반겨 맞아주었다. 국 령도는 내가 비록 대학 휘장을 달았으나 낡은 솜옷 등 차림새를 보고는 령도들이 상론하여 이미 단위 일터에서 떠나간 나에게 당시 돈으로는 적지 않은 50원을 쥐여주었다. 너무도 미안하고 감사한 일이다. 지금까지도 이미 돌아가신 령도들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이 나의 마음 쓰린 유감으로 남아있다.

대학생활에서 가장 영광스런 일은 건국 10주년 경축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당시 우리 학교는 중앙에서 각별히 중시하는 학교로서 경축행진 대렬에 참가하지 않고 천안문 앞 광장에서 색종이 꽃을 들고 국장(国徽)과 ‘1949-1959’라는 배경글자를 새기는 책임을 맡게 되였다. 다행히 나는 앞줄에 섰기에 천안문 성루에서 손을 흔드시는 모주석과 좌우에 선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국가 령도들과 흐루쑈브, 호지명, 김일성 등 여러 사회주의 나라 령수들의 모습을 아슬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천안문 앞 장안가에는 파도를 이룬 학생 대오를 비롯한 각 분야의 행진대오가 만세소리 높이 부르며 지나가고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비행 대형이 천안문광장 하늘을 날아예고 기계화 부대를 포함한 3군 검열대오가 보무당당히 지축을 울리며 지나가는 장면이 너무도 장관이였다.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던 행운은 나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자랑이다.

1962년 7월, 당중앙 오로(五老)중의 한분으로서 존경받는 오옥장(吴玉章) 교장의 도장을 찍은 졸업장을 받고 자나 깨나 갈망했던 대학생활을 결속짓게 되니 너무도 감개무량하였다. 동시에 지나온 일을 회억하게 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중학교에 가게 되였고 모교 재덕균 교장선생님의 동정과 관심이 있었기에 고중교육을 받게 되였으며 원 단위 진지달(陈志达) 국장을 비롯한 령도들의 배양과 지지가 있었기에 명문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게 되여 대학의 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나는 그들의 은혜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당과 나라의 혜택과 갈라놓을 수 없다. 금후 나는 사업에 충성하고 성취를 이룩함으로서 그들의 혜택에 보답하리라고 다짐했다.

나는 흑룡강성에 배치되였다. 안해는 2년 전에 대학 학업을 마치고 길림성 통화시에 배치받고 나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때문에 원 단위에서는 돌아오라고 하고 성인사청에서는 나보고 지원을 소원대로 선택하라는 기회도 고려하지 않고 성인사청에 신청하여 낯익은 땅을 떠나 낯설은 통화시에 배치되였다. 선후로 시법원, 지구 중급 법원에서 법관으로 23년간 사업하였다. 그 후 조직의 수요에 의해 길림성정법관리간부학원 성행정학원(후에 성위당교와 합병)에서 부교수로부터 교수로 법학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동시에 전국법학회 회원, 길림성법학회 리사에 당선되였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실천에서 얻은 경험과 새 지식으로 적지 않은 저작과 론문을 발표하고 한국, 일본의 여러가지 법전을 번역하였다. 이것은 국가에서 나를 배양한 결과이다. 나의 사업은 매우 평범하였으나 조직에서는 수차례의 선진사업자, 우수당원, 우수당무사업자 등 영예를 수여하였다.

대학교 때 학부 주임(우2)이 장춘 출장시 남긴 기념사진. 왼쪽 두번째 사람이 필자.

정년퇴직 후에도 ‘길림성 경제와 법률 자문복무중심’의 초청을 받고 법률부 주임, 변호사 사무소 주임을 책임지고 사업하였다. 지금까지도 변호사로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나의 생애는 큰 사적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와 선배들의 지지, 국가의 혜택으로 사회에서 계속 수요하는 존재였기에 늘 행복감을 갖고 살아오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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