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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68]기자생애 가장 뿌듯했던 16일간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29 15:10:12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8)

■ 오기활(도문)

1990년 제11회 북경아시아운동대회 개막식 회장에서 필자

27년전인 1990년은 30여년 기자 인생에서 정녕 제일 자랑스럽고 제일 뿌듯했고 제일 바삐 돌아친 나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중국 첫 대형국제운동회 특파기자로

제11회 북경아시아운동대회는 우리 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41년 만에 11억 중국인민이 자기의 땅에서 33억 인구의 아시아주의‘친선, 단결, 진보’를 취지로 처음으로 주최한 대형 국제 종합운동경기였다.

제11회 북경아시아운동대회는 아시아운동회 40년 력사에서 규모가 제일 상당한 대회로 37개 국가와 지역의 대표, 선수 6578명이 참가하여 27개 정식경기를 진행한 대형국제운동대회였다.

이 중국의 첫 대형국제운동회에 필자는 《연변일보》 특파기자로 물불을 가지지 않고 밤낮이 따로 없이 16일간(9. 22—10.7) 죽기내기로 뛰여다녔다.

이 대회에 중국이 636명의 선수를 참가시켜 183금, 107은, 51동상을 따내 본 운동대회 제1위를 차지했다.

중국조선족의 위상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지니고

《연변일보》는 11회 아시아운동대회에 파견된 유일무이한 소수민족 지역신문이였다.

이런 신분에 비춰 필자는 운동대회 소식기사보다도 중국의 첫 대형국제운동회 마당에서 우리 조선민족과 중국조선족의 위상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조선민족이 숨쉬는 기사를 발굴하면서 44세 나이에 운동화 바닥이 닳아서 구멍이 날 정도로 뛰여다녔다. 매번 200부나 되는 《연변일보》를 선수촌과 대회장에 발부하면서 세계 속의 조선민족을 만나보았다. 그 속에는 중국의 조선족은 물론 조선인, 한국인, 재일 조선인, 재미 조선인도 있고 본 운동회의 최고 거인선수인 리명훈(조선 남자롱구 선수, 23세, 키 2.32)도 있다.

그 때 선수촌에 입주한 만명 촌민의 5분의 1이 조선민족이였고 《연변일보》가 선수촌에 배달되는 유일한 조선문 신문으로 가장 인기가 높아 번마다 삽시간에 거덜이 났다.

그 때 담은 기사의 단락들을 적어본다.

— 9월 24일,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11회 북경아시아운동회 자금 모임에 기여가 큰 개인, 단위를 표창하는 대회에 해내외의 인사 1000명이 참가하였는데 그중에 유일한 중국조선족으로 리송관이 참가하였다.

—왕청현 하마탕뱀술공장에서 생산한 ‘흰눈섭’표 뱀술이 선수촌 부근에 자리잡은 북경장백산특산부 종합경영부의 인기상품으로 되였다. 선수들은 선수촌에 술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먼저 선불금을 내고 술병에 자기의 이름을 써놓는 방법으로 뱀술을 차지하고 돌아갈 때 갖는다는 계약까지 맺었다.

—연변을 벗어나니깐 조선족녀성들의 치마저고리가 얼마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가를 처음 느꼈다.

개막식 날인 9월 22일 오후, 천안문광장에 아름다운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성 8명이 나타나자 많은 해외의 관광객들이 둘러섰는데 그들 속에는 눈물을 짓는 할머니, 함께 아리랑을 부르자는 조선인, 사진을 함께 찍자고 기다리는 향항 처녀들과 일본인들이 줄을 지어있었다.

—길림성 매하구시 조선족 처녀 김향란이 61키로그람급 유도결승전에서 일본선수를 재끼고 1등 보좌에 올랐다.

—조선 대 한국 녀자축구경기에서 대방선수가 넘어지면 쫓고 뺏던 뽈까지 포기하고 대방선수를 일어나도록 부축하거나 심지어 안마까지 해주었다. 경기가 끝나 량측 선수들이 손에 손을 잡고 경기장을 돌면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자 경기장은 큰 박수소리와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고맙고 기쁘던 날

10월 2일은 북경아시아경기대회 11번째 날로 나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이 고맙고 기쁜 날이였다.

오후 2시 40분경, 우리 일행은 분주히 돌아치다 보니 제때에 점심식사를 못하고 려관에서 지친 몸을 달래였다. 문득 노크소리가 나더니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끝내 찾았습니다!” 하며 한족손님이 50원짜리 현금을 들고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돌아가며 생각하니 제가 선불금 50원을 결산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분이 우리를 태웠던 택시기사인데 우리가 택시를 탈 때 낸 선불금을 그만 잊고 결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응당 받아야 할 돈이라고 해도 손님이 려관까지 찾아서 ‘량심장부’를 결산하는 깨끗한 마음에 감복되여 문밖까지 멀리 나와 전송하였다.

오후 3시가 퍽 넘어서야 우리는 천안문광장 전문(前门) 부근에 자리한 ‘연길국수집’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하던 출납원이 우리가 자리에 앉자 맥주 두병을 들고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전번에 랭동시켜달라던 맥주 두병을 그대로 결산했는데 손님들이 다시 왔으니 시름을 놓았습니다. 혹시 오지 않을가봐 걱정을 했는데…”

뜻밖의 대접에 우리는 오늘은 전부‘공짜’만 생긴다며 기뻐하였다(후에 보니 이 집 주인은 당년에 연변서 명망이 높았던 ‘마씨네 씨름형제’의 셋째였다).

저녁 6시 20분경, 우리는 남자배구경기를 보려고 조양체육관으로 갔다.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 꼬리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 경로로는 표를 살 수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특별매표구’ 를 찾아가 기자증을 보이며 입장권 4장을 사겠다고 하였다. 매표원은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 원래는 인당에 한장만 파는데 특수대우로 4장을 드리겠으니 7시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오후 한시 반부터 줄을 섰다는 료녕, 산동에서 온 손님들이 우리가 조선과 마주한 연변서 왔다니 “외빈은 아니지만 귀빈이다.”며 자리를 양보했다.

이날은 운수가 좋았던지 아니면 우리에게 특별좌석표를 배치했는지 우리는 뜻밖에도 국제재판석의 바로 뒤자리에 앉았는데 우리들의 오른쪽은 재미 조선인, 왼쪽은 북경시 조선족 리직간부, 뒤쪽은 재일 조선족 로인들이였다.

북경아시아경기가 세계각지의 우리 민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던 것이다.

이날 경기에서 질 것이라고 추측했던 중국이 격전 끝에 3:2로 일본을 이겼다. 우리는 너무도 흥분된 나머지 경기 결속 후 한참을 기다려서 중국 선수들의 싸인을 받고서야 자리를 떴다.

이날은 여느 때는 손을 들어도 세우지 않던 택시들도 손을 들자 잘 멈춰섰다.

우리는 너무도 고맙고 기뻐서 “수자 11이 우리들의 길일이다.”며 귀로에 올랐다.

여운

그 때 통신수단은 전화, 우편, 팩스였다. 16일간 필자는 8편의 문자기사외 10여폭의 사진 기사를 발표하였다. 한번은 경험이 없는 필자가 본사 원고지에 띄여쓰기까지 한 원고 한건을(기억에 16페지) 팩스로 급히 보냈는데 개인 돈 140원을 썼다. 이에 편집사무실의 홍춘식 부주임이 원고를 띄여쓰지 말고 한장에 촘촘히 쓰라고 당부하였다.

그 때 필자는 11회 북경아시아경기대회 기금회로부터 ‘북경아시아운동회에 제일 먼저 기부한 기자’라는 영예를 받았고 《연변일보》 김성계 사장(겸 주필)의 주필상과 영예증서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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