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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58]금을 주고도 못 살 인생수업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04 12:46:13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상냥히 물어왔다. 당시 나는 리상과 포부로 충만된 랑랑 19세, 아무런 주저도 없이 미리 암기했던 말을 념불 외우듯 줄줄 내리외웠다.

“혁명이 수요하는 곳이면 곧 제가 가고 싶은 곳입니다. 가장 간고한 곳에 보내주십시오.”

기실 우전사업은 내가 그다지 바라던 것은 아니였는데 그렇게 판에 찍은듯이 외워댔으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갓 결속된 그 때의 시대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언어구사가 대체로 정치적 색채거나 공식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라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말을 들은 책임일군은 “좋소! 좋소! 교환수로 배치하겠소. 어떻게 하나 일 잘해주오.”라고 말하며 등록표를 건네주었다. 등록 후 나는 휘장이 달린 모자에 견장이 달린 상의, 스커트까지 전부 초록색으로 된 우정제복을 받았다. 그 때로부터 나는 교환수로 되여 국내외 수많은 전신 사용호들을 상대로 업무를 취급하게 되였다.

당시 모든 장거리전화는 교환수가 련결하고 끊고 해야 했는데 조작이 시끄럽고 복잡하였다. 레시바를 끼고 눈은 신호등을 주시하고 오른손은 다이얄을 돌리고 왼손으로는 끊임없이 키를 제끼고 귀로는 상대방이 통화를 시작했는지 들어야 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등 5섯가지 동작을 동시에 해야 했다.

연길시의 전화번호도 머리속에 환해야 장거리전화를 척척 걸어줄 수 있었고 번호를 숙달하게 암기해야 신속, 준확, 기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다.

나는 먹과 붓, 백지를 사다가 여러 단위의 번호를 다닥다닥 적어 집안의 벽에다 붙여놓고는 구들을 닦으면서도 외우고 밥을 지으면서도 외우고 신을 신으면서도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교환수로 일하던 초기의 일이다. 한번은 북경의 손님에게 연길백화점에 련계해준다는 것이 그만 화장터에 련계해주어 엄한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얼마나 죄송했던지, 나는 연신 사과하면서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수자 하나의 차이로, 3061을 3016으로 착각하고 련계해줬던 것이다. 이렇게 질책받고 힘들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우전국 ‘녀자탄광’이란 곳에 왔는가” 하면서 동요도 없지 않았지만 교훈으로 삼고 닫는 말에 채찍질하는 정신으로 업무에 더욱 열중했다.

번호 외우기도 무턱대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보고 외웠다. 병원에 가면 등록실, 진찰실, 급진, 외과, 내과, 입원처… 백화에 가면 1층, 2층, 3층 하면서, 또 상점을 지나가면 상점 간판을 보고 외우고 또 식초공장상표, 북산음료공장상표 등을 뜯어서 다시 책에 붙여놓으면 백프로 기억되였다. 옷을 입으면 옷공장 번호, 밥을 할 때면 량식창고 번호, 가마를 씻을 때면 가마공장 번호… 이렇게 길가에서나 집에서나 리용할 수 있는 일체 공간과 장소를 빼놓지 않고 리용해 외웠다. 하여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번은 파마점에서 건발기를 쓴 채로 귀는 건발기 소리에 들리지 않지만 입은 밖에 있는 줄 모르고 중얼중얼 30분이나 소리 치며 번호를 외웠다. 건발기를 벗으니 기다리던 손님들이 물어왔다. “제 교환수요?” “우, 어케 아십니까?” “이자 우렁차게 번호를 외우더구만…”

에피소드도 많았고 힘들 때도 정말 많았다.

2001년 통신사업이 발전됨에 따라 전화료금 체불 현상도 엄중하게 존재하여 우리 직장에서는 체불금을 받아들이도록 직원들에게 임무를 주었다.

무선전화는 이동성이 강한 데다 일단 꺼버리면 찾기 힘든 것이다. 이 임무는 근무시간외에 해야 했다. 나는 우선 컴퓨터를 통하여 사용호의 련계전화, 주소 등을 등록한 후 전화련계가 잘 안되는 사용호에 대해서는 주소에 따라 집을 찾아갔고 혹시 이주한 집이면 가두 치안주임을 찾아다니며 시내로부터 교외 등 곳들을 샅샅이 훑으면서 어둡고 위험한 층계를 오르내리며 체불된 료금을 받아들였다.

그중에서도 1,078원을 체불한 한 사용호만은 도무지 찾을 길 없어 컴퓨터로 종적을 따라 추격하듯이 그가 이전에 전화련락이 있었던 북경, 항주, 상해 등지를 꼬리를 물며 추적하여서야 끝내 사천성의 어느 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는 전화기를 분실했기에 자기와 상관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나는 법률적 책임에 대한 도리와 상식을 곁들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어 설복했다. 결국 그 사용호는 나의 사업심에 탄복하면서 ‘정탐’이란 별명까지 달아주면서 체불했던 금액을 직접 연길에 와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고생한 뒤에 빛을 보는 이러한 즐거움이 있었기에 아마 나는 힘든 줄 몰랐는가 본다.

또 한번은 2002년의 여름이였다. 때는 돌도 탄다는 삼복철, 길가의 가로수도 축 늘어지고 포장도로의 검은 골타르도 녹아서 신바닥에 붙어날 지경이였다. 내가 맡은 50호 체불호 가운데는 620원을 물지 않은 사용호가 있었는데 노트북을 신고스레 두드려서야 발전에 세집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3일 동안 련속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오불꼬불한 골목을 누비며 울퉁불퉁한 길을 땀벌창이 되여 달려서야 그의 부친이 일하고 있는 모 병원 쓰레기를 태우는 곳으로 찾아갔다. 갈증이 나고 무더위로 녹초가 된 나는 그 곳 담장안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쓰레기 환경으로 더욱더 구역질이 났다. 깨진 약병, 썩은 이불, 피고름이 묻은 붕대에서 쉬파리들이 윙윙 기승을 부리고 쥐가 살판치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찾는 사람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나는 너무 힘들어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국가의 돈을 꼭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흘을 다녀서야 끝내 그를 만났는데 생각 밖으로 자기 아들에게는 시티폰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였다. 나는 컴퓨터의 기록 대로 그의 아들의 출생년월일을 대조하면서 근거를 잡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의 아들이 자기 신분증으로 남에게 시티폰을 사주었던 것이였다. 이렇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면서 사용호를 찾아 체불금도 받아내고 또 사용호 이름도 고치도록 설복하였다.

나는 이렇게 몸과 마음의 고달픔을 이겨내면서 이동성이 강한 시티폰 체불금 8,900여원을 받아내여 기업에 적은 힘이라도 이바지하였다.

노력과 헌신은 거짓을 몰랐다. 나는 일터에서 여러가지 선진의 영예도 많이 안았다. 더우기 2003년에는 길림성통신회사 봉사모범의 영예를 안고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국가연회에 참가하는 행운도 지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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