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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40]자전거 타고 결혼하던 날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9-20 12:46:24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0)

◇김삼철(룡정)

자전거를 타고 결혼식을 올린 신랑 김삼철과 신부 임혜란의 1965년 6월 30일 약혼기념사진

지금도 내가 결혼하던 그 어설펐던 날을 생각하면 허구픈 웃음부터 나온다. 50여년 전이니깐 물론 지금과는 비할 수 없겠지만 열한명 식구에 로력이란 남성로력 나 혼자에 어머니와 아주머니 뿐이고 회갑이 언녕 지난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린 조카들이여서 가정생활이란 형편없이 쪼들렸다.

맏형님은 룡정고중에서 교원으로 사업했는데 한달 로임이 53원, 그 돈으로 대학교에 다니는 둘째형님의 숙사비, 식비, 학잡비와 어린 조카들의 학잡비를 지출하고 나면 20원도 남지 않았고 그것마저 몽땅 생산대에 식량대로 들여놓아야 했다.

식구가 많고 로력이 적은 우리 집은 해마다 가을 탈곡이 끝나도 식량값이 부족하다 보니 식구에 따른 식량을 제때에 탈 수가 없었다. 그럼 맏형님은 또 학교 공회 호조비를 꾸어서 생산대에 들여놓아야 했다. 이렇게 형님의 로임도 늘 꾼 돈을 제하다 나니 우리 집 생활은 몹시 어려웠다.

그런 가정에서 장가를 가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신랑 옷을 한벌 만들려 해도 돈이 문제였다. 그 때는 못사는 시절이였지만 그래도 대부분 집들에서는 결혼하는 신랑 옷만은 곤색 사지로 한벌씩 하였지만 우리 집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좋은 사지천 옷은 꿈도 못 꾸었다.

나는 맏형님이 하자는 대로 바지는 곤색 골덴천으로 하고 웃옷은 남색 반사지천으로 만들었다. 아래웃옷이 각기 다른 천에 색갈까지 다르다 나니 정말 꼴불견이였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신은 구두는 근본 생각도 안했고 도문시 고무공장에서 생산한 공농패 곤색 정구화를 샀다. 모자도 눅거리로 하나 샀는데 어느 하나 맵시 있고 보기 좋은 것이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서운한 말 한마디 없이 맏형님께 감사를 표시했다.

당시 나는 연길현(지금 룡정시) 광신향(지금 지신향) 광신촌에서 공청단지부서기 공작을 하였기에 나라의 정세를 알고 가정형편을 알기에 아무런 의견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결혼일자를 기다렸다. 신부측도 가정생활이 곤난하고 또 신부도 유신소학교 공청단서기여서 우리는 결혼전에 토론하여 자전거를 타고 결혼하기로 결정하였다. 결혼날자는 1966년 9월 4일, 당시는 문화대혁명 초기여서 곳곳에서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네가지 새것을 수립하는’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쳤다.

나는 결혼 전날 오후에 룡정시내에 가서 사전에 지인을 통해 빌려쓰기로 한 상해제 ‘영구’패 2.8자전거 한대와 천진제 ‘비둘기’패 2.6자전거 한대를 수레에 실어왔다. 모두 산 지 며칠 안되여 새 자전거나 다름없었다. 그 때는 ‘영구’패자전거와 ‘비둘기’패 자전거는 표제로 살 때라 지금의 ‘오디’패 승용차보다 더 귀하였다. 그런 자전거를 나는 돈 1전 쓰지 않고 빌려왔으니 당시 나의 관계망도 괜찮은 셈이였다.

결혼하는 날 아침, 나는 식전에 큰 도랑에 가서 키다리풀들을 몇지게 베여다가 퇴비장에서 록비를 만들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생산대마다 토지비옥도를 높이기 위해 농호마다에 농가비료 임무를 하달하였는데 집집마다 돼지, 닭, 오리 등 가축을 사양하며 농가비료 만들기에 열을 올리였던 것이다. 오전 9시가 되자 나는 ‘2.8’자전거 뒤에 있는 짐받이에 고무바퀴밀차 손잡이를 단단히 동여매고 그 우에 함 트렁크와 신부가 타고 올 ‘2.6’자전거를 싣고 7리 밖에 있는 유신촌 신부네 집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힘있게 내디디였다.

그래도 신부가 있는 유신촌과 내가 살고 있는 광신촌은 모두 연길-룡정으로 통하는 국도를 끼고 있어 흙길이라도 넓고 평평하여 자전거 타기에는 아주 좋았다. 신랑측 우시군들은 뻐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신부집에 도착하여 ‘함’을 드리곤 신랑상은 받지 않고 점심만 먹었다. 함이라야 트렁크 안에는 모주석저작과 모주석어록, 신부 옷 몇가지 밖에 없었다.

나는 오후 정각 한시에 신부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귀로에 올랐다. 신부측의 혼례이불과 트렁크는 고무바퀴밀차에 실었다. 신부측의 생빈들은 뻐스를 타고 왔다.

신부도 새각시상을 받지 않았으며 축의금과 축의례물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사절하였다. 당시 항간에서는 청년남녀들이 결혼하게 되면 모두들 ‘누구누구의 결혼을 축하합니다’라는 글발을 새긴 큼직한 체경들을 증정하였는데 나는 그런 것도 받지 않는다고 결혼전에 친구와 지인들에게 통보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결혼식에 참가한 하객들에게는 소박한 음식상을 차려 접대하였다. 저녁에도 조선족들이 즐겨하는 신랑신부 결혼축하 오락만회를 그만두고 로천에서 영화《상감령》을 방영하여 결혼식에 참가한 하객들과 당지군중들을 즐겁게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때 ‘너무했구나’ 하는 감도 없지 않지만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결혼사진 한장 찍지 않은 것은 너무도 력사를 존중하지 않은 경솔한 판단이였다는 것을 오늘 따라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모주석마크를 가슴에 달고 모주석어록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모주석저작을 함속에 넣고 결혼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따라 가슴 설레인다.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며 혁명하던 그 시대를 생각하면 가슴 벅차다. 비록 나는 지금처럼 호화로운 승용차를 타지 못하고 두바퀴자전거를 타고 결혼하였지만 가고 오는 차량이 희소한 큰길에서 신랑, 신부 단둘이 어깨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싱글벙글 웃으며 행복을 꿈꾸며 결혼하던 그 날이 더없이 소중하고 그립다. 당년에 자전거 타고 결혼했던 우리 부부는 지나온 반세기가 넘는 세월의 풍운 속에서 한치의 드팀도 없이 손잡고 걸어왔다. 여생의 석양길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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