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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25]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3)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7-24 12:26:19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25)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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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철

1993년 8월 복건성부련회 주임에서 물러선 후의 어느 날 윤봉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文正一)이 복주 서호호텔에 와서 찾는다는 통지를 받았다. 서호호텔에 가니 문정일은 윤복구인가고 인사하며 한국 렬사인 문명철을 아는가고 물었다. 일찍 연안 시절 이름 윤복구를 윤봉으로 고친 윤봉은 뒤미처 문정일이 한국에 갔다가 문명철렬사의 후손으로부터 문명철렬사의 묘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문정일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모두 문명철이 어디에서 희생되고 어디에 묻혔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문명철을 알자면 문명철의 련인으로 알려진 윤복구를 찾아야 했다. 알고 보니 윤복구는 연안 시절 윤봉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4년 8월 우리 나이로 22세 때 남편 오홍상(吴洪祥, 1914-2005)과 소속 당지부에 결혼신청을 내였고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받았었다. 이듬해 1945년 4월 23일에는 남편 오홍상이 연안 양가령의 중앙강당에서 열린 당 7차 대회에 참가하였다. 해방전쟁시기 오홍상은 화중군구 소속 제4종대 제12사 정위로 활동하다가 1949년 8월 17일 복건 복주가 해방된 후에는 선후로 공청단복건성위 서기, 중공 룡암지위 제1서기, 중공 복건성위 조직부장, 성위 부서기, 서기, 부성장, 제5기 성정협 주석을 력임하였다. 윤봉은 복건성부련회에서 부장, 부주임, 주임으로 활약하면서 《복건일보》에 〈한국 전우 문명철을 심절히 그린다〉는 회고문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문정일을 만나면서 문명철렬사의 후손들 뜻대로 문명철 묘소를 찾고 그의 유해를 찾아 한국에 보내는 것은 윤봉의 미룰 수 없는 책임으로 되였다. 이는 윤봉의 남편의 지지로 복건성위에 보고되고 성위 부서기 림개흠(林开钦)은 중한 두 나라 인민의 친선왕래를 알리는 력사의 견증이라면서 기꺼이 비준지시를 내렸다. 그 해 1993년 11월에는 한국으로부터 문명철의 조카인 김환종(金皖钟)으로부터 문정일선생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면서 련속 두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후 김환종에게서 또 몇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편지에서 김환종은 윤봉을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자기를 윤봉의 아들로 간주하였다. 정이 넘치는 편지들이였다. 그 때에야 윤봉은 문명철의 본명은 김일곤(金逸坤)이고 다섯 형제자매에서 넷째이며 문명철이 희생된 후에는 큰형 김유곤(金裕坤)에 의해 그의 맏아들 김환종이 문명철의 아들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2

1993년 그 해 윤봉은 이미 70세의 로인이였다. 멀리 산서에 가서 문명철의 묘소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럴 때 윤봉의 작은사위 진지겸(陈智谦)이 국외에서 돌아와서 이 일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태원으로 날아갔다. 진지겸이 찾은 곳은 산서성 민정청과 당사연구부문이였으나 그들은 문명철을 근본 모르고 있었다. 당년의 《해방일보》에서도 렬사의 희생된 지점을 밝히지 않았기에 산서성 당사연구부문에서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진지겸은 복주의 집으로 돌아간 후 1943년 5월 18일 연안 《해방일보》를 거듭 검토하는 가운데서 신화사에서 띄운 기사임에 주의를 돌렸다. 진지겸은 이미 리직한 원 국가민위 부주임 문정일에게 련락하여 북경의 신화사 총사를 통해 문명철의 희생지점을 알아줄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의연히 추도회 지점 뿐이고 희생된 지점을 밝힐 수가 없었다.

복건성부련회 주임에서 물러난 후 1990년대 중반의 윤봉

그래도 진지겸은 락심하지 않았다. 그는 두번째로 태원행에 올랐다. 1994년 음력설 이후 출국하였다가 귀국길에 북경을 경유하면서 모 군사부문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통해 1943년 4월 14일 문명철과 그의 전우들이 적들과 격전을 벌린 곳-산서성 흔현 흔오구(忻县忻五区)를 찾아냈으니 속이 든든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산서성과 흔주시 민정부문의 방조하에서 흔현 흔오구 소재지-흔현 합색향(合索乡)을 찾아냈으니 당년 전투가 벌어진 곳은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黄龙王沟村)이였다.

알고 보니 당년 문명철 일행이 적들과 벌린 전투는 흔현 합색향 경내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이고 희생자는 문명철 등 도합 3명이였다. 진지겸은 황룡왕구촌에서 당년 력사의 견증자와 렬사유체를 묻은 두 로인 그리고 전투지점을 답사하는 가운데서 끝끝내 문명철의 희생경과를 듣고 진실한 묘소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문명철의 자세한 희생경과와 묘소는 이같이 우리 조선족이 아닌 머나먼 고마운 이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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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시침을 1943년 4월 14일로 돌려보면 이날 새벽 날이 희붐히 밝아올 때 팔로군 사복무장 공작대원인 문명철 등 일행 4명은 하루 동안의 긴장한 활동을 마치고 황룡왕구촌 맨 뒤켠에 있는 촌민 소근해(苏根海)네 집으로 들어갔다. 소근해의 형 소근무(苏根武)는 팔로군 흔오구의 양성대상인데다가 이 집은 들어오거나 퇴각하기 편리한 우점을 가지고 있었다.

문명철 등 넷은 흔오구에서 활동한 지 어언 넉달이나 되고 소근해 집을 여러번 드나들었기에 사람이나 주위환경이 비교적 익숙한 편이였다. 이들 네 사람을 보면 문명철은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 조직위원이고 팔로군 간부인 호이명(胡以明)은 호남성 태생으로서 30세 좌우였다. 이밖에 팔로군 통신원 류명량(刘明亮)은 산서성 태생이고 17세, 리동지(老李)로 불리우는 지방간부는 30여세로 알려졌다.

이들 팔로군 사복무장 공작대원들이 활동하는 황룡왕구촌은 100여명 인구를 가진 산간마을로서 팔로군 흔현 흔오구 관할구역에 속하였다. 실상은 적아교체구역이여서 당지 사람들에게 문명철은 장동지로, 호이명은 호동지로, 지방간부는 리동지로 통하였다. 문명철 등이 집안에 들어서자 소근해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좁쌀죽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1996년 문명철의 묘소가 한국으로 이장된 후 그 곳엔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죽이 다 되고 식사를 서두를 때다. 총창을 꼬나든 왜놈 몇이 갑자기 두번째 문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근해가 먼저 적정을 발견하고 소리치니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구들에서 뛰여내렸다. 통신원 류명량이 먼저 창턱에 놓은 수류탄 하나를 집어 도화선을 당긴 후 두번째 대문에 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왜놈 몇놈이 꺼꾸러졌다. 그 사이 문명철 등 넷은 담장을 넘어 서하구 기슭의 봇나무 숲속에 들어서며 서쪽으로 달렸다. 리동지가 제일 앞에서 달리고 그다음은 류명량과 호동지, 나중에 문명철이 달리며 동지들을 엄호하여나섰다. 페결핵을 앓고 있던 문명철은 몸이 휘청휘청하였지만 자기의 직책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날 동원된 왜놈과 괴뢰군은 도합 200여명이고 두길로 나뉘여졌다. 문명철 등은 앞쪽 적들의 포위는 헤쳤지만 뒤쪽 적들의 포위는 헤치기가 어려웠다. 적아쌍방은 어느덧 서하구 쪽 세갈래 갈림목에 접근하였다. 이곳은 골짜기가 불시에 90도로 꺾어들기에 적아쌍방은 대방을 보아낼 수가 없다. 류명량이 적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적들과의 거리가 20메터 밖에 안되였다. 류명량은 수류탄을 던져 적 몇놈을 쓰러눕혔다.

류명량이 두번째 수류탄을 던지려고 할 때 적탄에 머리를 맞았다. 그러나 적들이 맹렬한 화력으로 문명철과 호이명을 골짜기 안에 제압하였기에 명량이한테 접근할 수가 없다. 그렇게 류명량은 희생되였지만 문명철과 호이명은 약 30메터 거리를 두고도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4

두 사람은 신속히 남구 쪽으로 후퇴하였다. 호이명이 앞에 서고 문명철이 뒤에 섰다. 남구 약 50메터 지점에서 적들의 화력에 의해 둘은 갈라지게 되였다. 그러다가 호이명이 희생되고 문명철도 탄알이 떨어졌다. 그의 수중에는 수류탄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적들은 대방이 전부 죽은 걸로 알고 총창을 꼬나든 채 문명철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찰나 문명철이 벌떡 일어나서 손에 총을 든 채로 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적들은 문명철의 다리에 총을 쏘았다. 문명철은 쓰러지고 권총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두 다리에서는 선지피가 마구 쏟아졌다. 적들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자 문명철은 류창한 일본어로 소리질렀다.

“너희들 왜놈들은 조선과 중국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저질렀다. 너희들도 처자와 나라가 있으면서 왜 중국에 와서 폭행을 감행하느냐? 위대한 중조 아들딸들의 항일사업은 정의적이다. 인류의 진보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적들은 일시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어 일본군관이 저자를 끌어가라고 소리지르자 한무리 왜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때라고 문명철은 품에서 마지막 수류탄을 꺼내여 도화선을 당기며 적들한테로 굴러갔다…

당년 문명철 일행이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며 싸우던 황룡왕구촌 타라산(陀罗山)의 한 모습

조선전우 문명철의 희생소식이 전해지자 진서북 각계에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1943년 5월 4일에 진서북 군구 주둔지에서는 ‘조선혁명전우 문명철렬사 추도대회’를 장중히 열었다. 이어 태항산근거지의 《항일일보》에서 특집을 내였다. 5월 17일부 연안 《해방일보》는 신화사 진서북 16일발 통신을 내면서 진서북 각계에서 조선혁명전우 문명철동지를 추모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943년 6월 18일부 연안 《해방일보》 보도는 또 “1943년 6월 6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청년혁명학교 세 단체에서 태항산근거지에서 또 문명철, 김산륜 두 렬사를 위해 추도대회를 가졌다.”고 쓰고 있다.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黄龙王沟村)이였다.

중국 동지들에게 조선전우로 불리운 문명철은 희생된 후 지금의 산서성 흔주시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 동산에 묻히였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나 문명철은 그의 중국 전우이고 련인인 윤봉과 그의 작은사위 진지겸, 여러 부문의 도움으로 황룡왕구촌 밖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을 진지겸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보고하고 한국의 보훈처에도 알리였다. 한국 보훈처에서는 관원 두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 현지에서의 확인을 거쳤다.

1995년 6월 중국 외교부에서는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 문명철렬사의 유해를 한국에 이장함을 동의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드디여 1996년 10월 22일에 진지겸과 한국 김환종, 한국 보훈처의 두 관원 그리고 산서성 3급 민정부문의 사람들 도합 일행 10여명이 전문차로 산서 흔현 황룡왕구촌에 갔다. 이튿날 오후 중국땅에 장장 52년이나 묻혀있던 문명철렬사의 유해는 골회로 되여 한국 김포공항에 이르고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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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한국의 김환종이 복건 복주에 가서 ‘이국모자’ 상봉을 이루었다. 잇달아 김환종의 19세 아들 김지수(金志洙)가 윤봉 부부의 도움으로 복건사범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였다. 2004년 봄에 진지겸 등은 윤봉의 부탁으로 한국 대전에 가서 문명철렬사 묘소를 배알하고 전라남도에 가서 김환종 일가를 찾아보았다. 김환종의 딸 김수정(金秀婷)도 윤봉의 지지와 복건성정부의 특별비준으로 복건사범대학 해외학원에 학비면제로 입학하였다…

한국의 문명철(김일곤) 고향집 집터   /이상 자료사진

2017년 7월 11일 위해 석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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