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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24]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2)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7-17 14:49:21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24)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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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0월, 윤봉은 중경으로 출발하는 조선의용대 일행 속에 섞여 계림을 떠났다. 려비가 따르지 못하는 연고로 이들 일행은 뻐스 따위를 리용하지 못하고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 편을 리용해야 했다. 그나마 화물차 꼭대기라 짐을 동인 바줄을 꽈악 잡아야 하는데 ‘마귀로선’이라 이름난 귀주 동재(桐梓)구간의 굽이굽이 ‘72굽이길’만 한시간 푼히 달릴 때면 머리가 쭈볏해났다.

그렇게 험악한 길을 달리며 중경에 도착하니 윤봉은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와 더불어 남안(南岸)의 진가화원(陈家花园)에 자리한 조선의용대 총대부에 두달 동안 머물면서 휴식정돈과 학습에 나서야 했다. 문제는 페결핵을 앓는 윤봉이 늘 열이 오르고 피를 토하는 것. 그 때를 두고 윤봉은 〈잊지 못할 전우〉란 한편의 회고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문명철은 의사를 청해다가 나의 병을 보이고 생활면에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중경을 떠난 후 나는 또 학질에 걸렸었다. 문명철은 늘 나의 짐을 들어주기도 하고 이모저모로 살뜰하게 도와주면서 꼭 병마를 이겨내고 행군임무를 완수하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윤봉은 계속하여 문명철을 외우고 있다.

1938년 완남에서의 윤복구(윤봉)의 사진

행군길에서 문명철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애로운 어머니와 아름다운 조국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했다. 그는 “조국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가 없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군 했다. 행군길에서 그는 여러가지 돌멩이를 줏기를 즐겼는데 돌멩이를 주어들고는 이 돌에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여 있고 저 돌에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여 있다고 하면서 호주머니에 주어넣었다가는 표본으로 삼았다. 그는 “혁명이 승리한 후 나는 과학가가 되여 지질학을 연구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조국건설에 이바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고문은 전문 문명철렬사를 추모하여 쓴 회고문으로서 중국인 녀성 윤봉에 대한 문명철의 애틋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랑이 있었으므로 문명철은 그로부터 몇년 후 산서의 한 오지에 이름 없이 쓰러졌지만 사랑했던 련인인 윤봉에 의해 묘소가 발견되고 자기의 조국땅에 다시 묻힐 수가 있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갸륵한 존재였다.

드디여 그들은 1941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윤봉은 조선의용대 총대부의 일부 간부들과 제1지대, 제3지대 대원들과 함께 중경부두에서 ‘민생호’ 기선에 올라 중경을 떠나 북상길에 올랐다. 국민당의 풍옥상, 리제심 등 애국장령들과 애국인사들은 조선의용대가 떠나는 전날밤 성대히 환송하면서도 우리 조선동지들이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이동한다는 것을 몰랐다. 총대부에서 극비리에 팔로군 중경판사처의 주은래동지께 청시하고 결정한 일이여서 그들은 알 리가 만무했다.

그 때 태항산근거지 두리의 화북땅에는 20여만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매불망 바라던 념원이 현실로 되자 문명철 등은 가슴이 한없이 후더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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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호’는 해종일 달린 끝에 산간의 자그마한 도시 만현(万县)에 이르렀다. 만현의 조선인 최성오의사와 그의 안해가 반갑게 맞아주고 술에 풍성한 안주까지 마련하여 제법 흥성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조선의용대 대원들 속에는 조선녀성 장수연, 중국녀성 윤봉(문명철의 련인), 일본녀성 권혁에다 국민당 군대에 잡혀갔다가 의거한 조선동지들이 있어 국제적인 대오를 방불케 하였는데 오락판이 벌어지자 녀성대원들이 선참 공격목표가 되고 조선노래, 중국노래, 쏘련노래, 일본노래가 터져올랐다.

그중에서도 문명철의 련인 윤복구가 부르는 중국노래, 쏘련노래가 자못 인기를 끌었다. 열다섯살부터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에서 사업해온 윤복구-윤봉에게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의례 한마디 “목이 쉬였어요”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날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가 옆에 앉은 문명철이를 곁눈질하자 눈치를 챈 문명철이 제꺽 하모니카를 꺼내들고 련인의 노래에 멋들어지게 반주를 해주었다. 문명철은 아무리 어려운 나날에도 하모니카만은 늘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틈만 생기면 꺼내 불군 하였다. 만현 최성오의사 병실 연회에서도 그 재주가 남김없이 드러났다.

윤복구(윤봉)랑 류숙하였던 동욕진 상무촌의 옛 사찰-홍복사 일각    /2017년 6월 현지촬영

중국인 녀성 윤봉과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환난지우 사이를 잘 말해준다. 그들은 옹근 반년이란 기간 사천, 호북, 하남, 하북, 산서 등 성을 거치면서 그 해 1941년 6월 초의 어느 날 오매불방 태항산항일근거지-팔로군총부 소재지인 료현 동욕진(辽县桐峪镇)에 도착했으니 정녕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윤봉은 조선의용대 동지들과 더불어 동욕진 상무촌(上武村)의 옛 사찰-홍복사(洪福寺)에 류숙하게 되였다. 로신예술학교 태항분교도 상무촌에 자리잡아 진정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두어달 후, 적절히 말하면 윤봉은 팔로군총부 정치부에 소환되였다. 그 후 1942년 5월의 반소탕 때에는 또 연안 행에 오르면서 윤봉과 문명철은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연은 소중하여 문명철은 인편에 연안의 윤봉한테 포도당칼슘 주사약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시절로 보면 그 주사약은 아주 귀한 약이였다. 문명철은 자기도 페병에 시달리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귀중한 주사약을 윤봉에게 보내주었으니 윤봉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포도당칼슘 주사약을 받은 후 윤봉은 다시는 문명철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문명철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그 후 연안에서 강생이 벌린 ‘실족자 구하기’(抢救失足者) 운동이 잘 알려주고 있다. 이 운동에서 윤봉은 국민당통치구에서 왔다는 것과 조선의용대 전우 문명철과의 련애관계로 하여 이른바 ‘실족자’로 락인되여 전문심사를 받게 되였다.

3

그 때의 연안은 말 그대로 남자가 많고 녀자가 적어 남녀청년의 비례가 대략 10분의 1을 이루었다. 그만큼 녀자들이 적으니 연안이란 이 특수한 환경에서 녀자들은 남자들이 추구하는 목표로 되였다. 윤봉도 례외가 아니였으니 늘 청년남자들이 주변을 돌며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래도 윤봉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윤봉이를 보고 윤봉이 소속 방직부의 한 지부서기 풍력(冯力)언니는 남자가 크면 장가들고 녀자가 크면 시집가기 마련인데 하며 리해되지 않아했다. 이에 윤봉은 자기에게는 남자벗이 있다고 속심을 터놓았다. 지부서기 언니는 누군가고 물었지만 윤봉은 아직 말할 수 없다고 뒤를 달았다. 윤봉은 문명철과 헤여져 연안으로 온 후 포동당칼슘 주사약을 받았을 뿐 그 후 한번의 련락도 없었으니 어찌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있었으랴.

어느덧 시간은 살같이 흘러 1943년이 왔다. 이 해 5월 28일 연안의 《해방일보》 1면 톱기사에는 〈진서북 각계 조선혁명전우 문명철동지를 추모〉란 기사가 실렸다. 기사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940년 11월 중경에서 찍은 윤복구와 오빠 윤복화의 기념사진

문명철동지는 진서북 모 분구에서 사업하며 적대투쟁의 최전선에서 적들 속을 드나들다가 4월 14일 불행히도 100여명 적들의 사면포위에 들었는데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중국동지와 함께 포위를 헤치고저 적들과 격전을 벌리며 몇몇 놈을 살상하였다. 마지막에 탄알이 떨어진 역경 속에서 최후의 수류탄을 적에게 던졌으며 자기도 수류탄 폭발 속에서 영광스럽게 순국하였다.

《해방일보》 기사를 본 윤봉은 놀라마지 않았다. 문명철은 일찍 윤봉이 영웅패장 역을 맡았던 단막화극 〈최후의 수류탄 하나〉의 영웅패장처럼 최후를 마치면서 “윤동지가 맡아나선 영웅패장은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나 역시 영웅패장과 같은 경우라면 용감하게 희생될지언정 절대 적들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라던 맹세를 실천하였었다. 윤봉은 이같이 졸지에 자기의 친밀한 전우이며 사랑하는 조선오빠인 문명철을 잃었다. 그의 마음은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윤봉은 뒤늦게야 문명철이 조선의용대의 동지들과 함께 1942년 7월, 오늘의 하북성 섭현 섭성진 중원촌에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고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 대원으로 뽑혀 적후무장선전활동의 진두에 나섰음을 비교적 자상히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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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명철 소속 무장선전대는 최전방 선전사업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 싸우다가 포위된 곳은 한 농가 안이였다. 그는 농가의 창문을 리용해 반격하다가 천정을 뚫고 지붕 우로 나가서 놈들을 따돌렸다. 그러다가 마을 끝에서 왜놈 군대 하나가 나타나 총창으로 그를 막아나섰다. 문명철은 태연하게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놈의 가슴패기를 겨누었다. 왜놈이 일순 어리벙벙해할 때 문명철은 그 놈을 재끼고 마을을 벗어났고 무장선전대 대원들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다.

또 한번은 모 분구에 파견되여 사업하다가 10여배에 달하는 적들의 포위에 빠져들었다. 극히 불리한 사태에서 문명철은 전우들과 더불어 맞불질로 적들을 쓸어눕혔으나 어언중에 탄알이 다 떨어졌다. 적병이 들이닥치자 문명철은 빈 총을 적의 가슴에 들이댔다. 적병이 깜짝 놀라 주춤하는 순간 문명철은 날쌔게 그 자의 총을 나꿔채여 그 자를 찔러죽이고 무사히 피해버렸다.

이같이 문명철은 류달리 용감하고 침착하고 기민하여 온 진동남 일대 군민들 속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떠올랐다. 1942년 5월 진동남 반소탕 전역에서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눕히며 기관총 9정을 로획하여 대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오늘의 흔주 황룡 왕구촌 모습

1942년 9월에 문명철은 진서북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의 조직위원을 맡아나섰다. 1943년 초에는 팔로군 진서북군분구에서 사업하였다. 진서북분맹이나 진서북군분구 때나 주로 적후선전사업에 종사하며 사선을 넘나들었기에 문명철의 신체는 몹시 허약해갔다. 조직과 동지들이 후방휴식을 수차 권해도 그는 항일의 최전방에서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던 1943년 4월 14일 아침, 문명철은 다른 2명의 팔로군동지와 함께 적후의 한 마을에 머물렀다가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의 돌연진공에 맞다들었고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하나로 적진에 뛰여들며 장렬한 최후(상세한 내용은 다음 회로 미룬다)를 마쳤으니 윤봉은 일순 비통에서 헤여나지 못하였다.

윤봉이 큰언니라고 부르는 풍력은 윤봉의 소속 지부서기로서 뒤늦게야 윤봉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였다. 사실 윤봉이와 문명철은 사랑다운 정식 사랑을 해보지 못하고 맘속으로 새겨두고 있었을 뿐이였다. 풍력언니는 윤봉에게 정식으로 오홍상(吴洪祥)이라는 청년을 소개해주었으니 오홍상은 민월감(闽粤赣)변구에서 선출되여온 당 7차 대회 대표이고 중공 민월감성위 청년부장 겸 영정(永定)중심현위 서기였다. 영정은 오늘의 복건성 영정현을 가리킨다.

2017년 7월 10일 위해 석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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