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겨레렬사비18]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2)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7-06-05 13:30:14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8)

■ 리 함

1

 

양림(자료사진)

양림의 최후와 희생을 두고 홍군장정기사총서 《동방매력-장정과 외국인》을 출판한 저자이고 한족으로서 거의 유일하게 양림 전기를 비교적 품위 있게 다루고 있는 소현사는 너무도 애달픈 나머지 양림 전기 마지막을 이렇게 쓰고 있다.

1936년 2월 22일 필사제는 상처가 과중하여 구급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끝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그는 최후의 한발자국을 동정 도중에 남기였으며 황하가에 찍었다.

양림이 황하가에 쓰러진 후 그의 조선인 전우이고 양림과 더불어 홍군장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친 무정장군은 섬감근거지에서 자기의 친구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장정결속 후 우리는 1936년 2월에 황하를 도강하였다. 그때 양림과 나는 둘 밖에 남지 않은 두 조선인 군관이였다. 양림이 황하를 강행하는 돌격대장으로 뽑히였다. 이는 목숨을 내건 과업이였다. 돌격대는 황하를 건넌 후에 황하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양림은 탄알에 맞았다. 그때의 의료조건으로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옹근 하루를 부대끼다가 고통스런 시달림 속에서 죽어갔다.

양림, 중국공산당인들로부터 국제주의전사와 공산주의전사로 불리운 겨레의 빛나는 별이고 홍군 고급장령인 양림은 이렇게 동지들 곁을 떠나갔다.

‘하다면 혹여나 양림의 묘소를 찾을 수 있을가…’

택시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벌써부터 가슴은 두근거린다. 기대의 마음이 앞서는 심리작용이였다. 택시는 벌써 왕가하촌과 하구촌 사이 산언덕을 돌아돌아 내린다. 하구촌과 왕가하촌 사이를 누비며 황하로 흘러드는 무정하가 눈앞에 쫘악 펼쳐진다. 당년 양림이 홍15군단 황하도하 선견퇀을 배로 훈련시키던 그 무정하여서 정답기만 하다. 택시는 어느덧 무정하를 가로지나는 낡은 다리를 지나 하구촌에 들어선다. 하구촌 중심가에는 결혼하는 한쌍의 젊은 남녀를 옹위하며 숱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구촌과 왕가하촌이 무정하를 사이두고 서로 이웃해 황하 대안의 현애절벽 우 하가와촌과 마주 바라보다.

목적지에 이르렀으니 택시를 보내야 하였다. 그런데 황하의 낮은 언덕가에 자리잡은 집 주인을 찾으니 지금은 황하를 건너는 배가 없고 황하를 거슬러 3~4키로메터 가야 황하를 건너는 다리가 있단다. 택시를 돌려보낸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황하 대안의 하가와촌으로 가자면 황하다리를 건너 에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되니 그 길은 10키로메터를 많이 벗어난다.

2

하지만 소침정서도 한순간, 이번에는 기분을 바꿔 하구촌 길가에서 한담하는 마을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잡담이기는 하지만 그런 잡담 속에 뭔가 건덕지가 잡힌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나였다. 잡담 속에서 과연 두가지 중요한 단서를 잡았으니 하나는 황하를 건널 수 있는 뽀트가 금방 강 대안으로 갔으니 자기들이 련락하여 주겠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곳 무정하 대안에 양림이라고 하는 홍군장령이 묻혔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두 홍군전사의 무덤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기어이 전사의 무덤이라고 못박는다. 그들 속에는 마을의 장년들과 나이 지숙한 70대의 로인 분들도 끼이였다.

이럴 때 황하 대안 산 서쪽으로 갔던 뽀트가 돌아왔다는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기쁜 김에 고마운 마을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급급히 황하나루터로 내려갔다. 뽀트는 우리 부녀 간을 태우고 미끄러지듯 황하를 가로질러간다. 아차, 후회가 전신을 감싼다. 좋다는 기분에 훌쩍 떠나다 보니 전사의 무덤이라는 그 묘소를 찾아보지 못함이 맘에 걸린다. 내친 걸음이라 돌아서기도 어려웠다. 이 뽀트는 황하 대안 산서 하가와촌의 뽀트로서 오늘 마지막으로 나서니 말이다.

양림 소속 황하도하작전의 옛 마을 하구촌이 보인다

어찌하든 뽀트는 거의 일직선으로 달린다. 이곳 황하 구간은 비교적 잔잔히 흐르는 구간이여서 뽀트는 평온하기만 하다. 보매 이곳 황하의 너비는 400-500메터는 잘될 것 같았지만 섬서 북안에서 산서 대안까지 거리를 잠간사이에 조여준다. 병풍을 두른 듯한 산서 대안의 현애절벽이 아스랗게 높아만 보인다.

뽀트를 몰아준 이는 산서성 석루현 신관향 저두촌(辛关乡咀头村)의 한 40대 사나이. 그는 황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한편 뽀트로 산서땅과 섬서땅을 이어주고 있다고 한다. 황하 동안에 이른 후 그는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온다.

“산우 하가와촌으로 가려는데요. 이곳 현애절벽 사이 오솔길을 타고 싶어유.”

“아니 아닙니다. 오솔길이 있긴 해도 대단히 위험해요.”

“그럼 어쩌지요?”

“방법이 있어요. 저희와 같이 저 아래쪽 굽이 우리 마을로 돌아가시지요.”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라며 산을 잘 타는 필자라 해도 인젠 한다하는 젊은이가 아니였다. 산을 탄 경험도 없는 처녀애—딸애도 있지 않는가. 우린 뽀트 임자(두 사람)들을 따라 하가와촌 가까이 아래마을이라는 저두촌을 바라고 황하를 따라 내려갔다.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지지누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리도 보고픈 황하의 제1만(黄河第一湾)도 뽀트 임자네 마을에서 8키로메터 밖에 되지 않는다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만 한다.

3

그렇게 몇리를 걸었을가. 황하 동안에 병풍처럼 일어선 현애절벽은 차차 낮아지더니 황하가 오솔길은 수레길로 변해 산언덕을 굽이돌며 오르기 시작한다. 여기 산언덕은 대추나무로 덮이고 그 속에 황토고원의 움집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뽀트 주인은 자기들이 사는 저두촌(咀头村)이라고 소개하여 준다. 그러면서 손님들이 하가와촌 현지답사를 마치고 황하 제1만을 거치며 석루현성까지 가자면 굽이굽이 황토고원을 자유자재로 달리는 소형뻐스가 있어야 한다고 동을 단다.

“소형뻐스요? 어디서 구해요?”

“근심하지 마시고 천천히 걸으세요.”

나의 어이없는 모습에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뽀트 주인은 겅정겅정 앞서 나간다. 이윽고 소형뻐스 한대가 마주온다. 보매 뽀트 주인이다. 그는 자기는 소형뻐스를 몰기도 한다면서 우리들이 바라는 하가와촌이며 황하 제1만이며 모두 거치면서 석루현성까지 모셔다 주겠단다. 그 순간 뽀트 주인이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우리 말로 하면 보통이 아니고 대단히 고마운 사람이였다.

뽀트 주인이 사는 저두촌에서 하가와촌까지는 2~3키로메터 거리였다. 황토고원의 한 산령을 이루는 길 따라 한참 톺으니 그렇게도 가보고 싶던 하가와촌이다. 하가와촌은 지금 석루현 신관향에 속하는 한 마을인데 고원의 산정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주로 두개의 골안을 이루는데 첫 골에 대부분 인가가 집중되여 있다고 뽀트 주인은 말한다. 인가라야 거의 전부가 황토고원의 움집들이다. 당년 양림은 홍15군단 선견대를 지휘하여 선참 황하를 넘어 하가와촌까지 짓쳐왔다가 적탄에 총상을 입고 이 마을에서 희생되였었다.

양림의 희생지 산 서쪽 하가와촌

하가와촌의 움집들은 당년의 집들이 아니여서 이 마을의 어느 곳에서 희생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뽀트 주인은 양림에 대해선 금시초문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나는 딸애와 함께 하가와촌의 이모저모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뽀트 주인—소형뻐스 운전사와 부탁했다. 하가와촌 구내에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도 마을의 이상분들과 잘 문의하여 알아봐달라고 말이다. 뽀트로 황하 북안 하구촌에도 드나드니 꼭 명심해 봐달라고 청들어도 보았다.

“양림이란 분이 희생될 때 나이가 얼마 돼요?”

“36세입니다!”

“36세요, 참으로 아까운 나이입니다. 홍군의 고급장령이라 하니 더구나 그렇지요.”

뽀트 주인은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서 꼭 기억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한다. 그러니 이곳 황하 량안 하구촌과 하가와촌을 이제도 몇번은 다녀야 함을 전에없이 강렬히 느끼였다. 어쩌면 양림의 무덤을 찾아낼 것만 같은 느낌이 전에없이 강하게 강하게 흘러든다.

소형뻐스는 잠간사이에 하가와촌을 지나 산의 정상에 이른다. 나는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하고는 세우기 바쁘게 딸애를 데리고 가까이 최정상 언덕으로 치달았다. 바로 턱밑은 아니나 좌우쪽 저 산아래 황하가 은띠처럼 환히 내려다보인다. 아래쪽은 하구촌 그대로이고 웃쪽은 하구촌 3~4키로메터 우에 있다던 황하다리가 아닌가. 운전기사는 이곳 최정상 부분은 옛날 산서군벌 염석산(阎锡山)이 홍군을 막느라고 만들어놓은 군사보루라고 알려준다.

4

이날은 2012년 7월 4일,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이날 우리는 고마운 뽀트 주인의 받들림으로 황하 제1만이라는 넓고 희한한 원형의 엄청난 황하 굽이를 유람하면서 희생을 앞둔 양림과 주사제의 대화에 오른 석루현 의첩진(石楼县义牒镇)을 통과했으며 근 50리 밖의 석루현성에도 무사히 이를 수 있었다. 비록 양림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양림이 희생된 하가와촌의 구체 지점, 치료하던 집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제날 황하 도하 지점을 찾고 희생지를 거치였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껴야 하였다.

그때로부터 어언 또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5년 세월 속에서도 언제 한번 양림의 묘소를 잊어보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원인이 없지 않다. 조선문 《불멸의 발자취》 저자인 김성룡은 책에서 2003년 10월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중앙방송국 등 기자와 연구일군들로 이루어진 답사팀은 석루현성의 동정항일기념관과 하가와촌의 양림 희생지를 찾아보았다면서 중요한 단서를 알리였기 때문이다. 그들 답사팀이 석루현 당사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했다는 전보왕(田补旺)로인을 만났을 때 전보왕로인은 답사팀에 양림의 유체는 처음 하가와촌(황하 동안의 산서땅)에 안장했다가 동정을 마친 홍군이 철수하면서 다시 황하북안의 하구촌에 이장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양림은 하구촌 북쪽을 이룬 사진 속 저 무정하 기슭 어디에 묻히여   /이상 사진 2012년 7월 4일 현지촬영

전보왕로인은 또 답사팀의 조선족 기자들에게 당년 홍15군단 참모장이고 홍15군단 도하사령원인 주사제(周士第)가 양림을 혼자 적후에 둘 수 없다고 하면서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인 하구촌에 이장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던 주사제는 해방후 양림의 묘소를 찾고저 이 고장을 찾아보았지만 오랜 세월 탓으로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참으로 유감중의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전보왕로인이 알려준 중요한 단서이기에 언젠가는 꼭 찾아낼 것만 같은 흥분으로 들뜨게도 한다.

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아직도 막연하나마 일루의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언젠가 이 일루의 희망이 현실로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하여본다.

본문의 주인공 양림은 누구던가. 홍15군단 75사 참모장에만 머무를가. 아니지 아니지. 강서 중앙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할 때의 양림은 국내외 군사학교를 6개 소나 다닌 황포군관학교 출신이 아니던가. 일찍 국민혁명군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이 아니였던가.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 로동과 전쟁위원회 참모장, 중앙군위 총동원무장부 참모장, 홍23군 군장, 홍1군단 참모장, 월감군구(粤赣军区) 사령원이 아니였던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을 맡은 우리 홍군의 고급장령이 아니였던가…

2017년 5월 9일 재정리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