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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51]소학교졸업생이 대학생,촬영가로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2-17 14:08:50 ] 클릭: [ ]

—전죽송 조선족농민들의 생활과 연변의 사회실태 사진으로 보여주어

화책을 펼쳐들고 설명하는 전죽송선생.

지난해 4월, 친구가 회장을 맡고있는 사계절등산팀을 따라 력사문화답사를 떠났다가 우연하게 만난 사람이 바로 촬영가 전죽송선생이다. 등산복에 모자까지 꾹 눌러 쓴 그는 성격이 수더분하고 70세가 넘은 나이지만 젊은 시절의 미남형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현재도 등산과 같은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잘 가꾸는 분이였다.

기실 그전에도 “3•13”반일운동 97주년기념활동에 참가했다가 전선생을 만난적이 있다. 행사 사회자가 전죽송은 반일지사 박상진(“3.13”의사릉에 이름을 올린 17명 의사중 한사람)의 외증손자라고 소개하고 기념활동에서 반일의사 가족대표발언까지 부탁하는것이였다. 박상진의사가 생전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분 역시 항일활동을 하다가 희생되였고 슬하에 남긴 딸과 아들중 큰 딸이 바로 전죽송선생의 어머니라는것이다.

3.13반일의사릉과 비뒤면에 새겨진 의사명단.

조선족력사와 문화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필자는 선생을 만나 단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베일에 가려진 그의 가정사를 듣고싶었다. 대형예술력사저서《중국조선족예술사》의 촬영사부문의 “사진관사”부분을 집필하고있는 선생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받아 동북아호텔부근에 자리잡은 선생의 저택을 찾았다.

우연한 기회가 나의 일생을 바꾸어놓았다오. 소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중앙민족학원 미술예과반에 응시했는데 무난히 입학했단말이요. 13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기념으로 준 낡은 사진기를 메고 북경으로 갔는데 그때로부터 촬영은 나의 또 다른 애호로 되였고 지금은 아예 그림보다 사진에 더 빠져있다오.” 대화는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중앙민족학원에서 사생하는 전죽송(1963년).

1959년에 중앙민족학원예술계에서는 미술전업을 설치하고 룡정에 와서 예과반 학생모집하게 되였다. 초중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전 연변에 2명의 명액이 주어졌었다. 당시 전죽송은 소학교졸업생이므로 예과반에 응시할수 없었지만 담임교원이였던 최경숙선생님이 1957년 6.1절 학생전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전죽송의 미술작품을 학생모집판공실에 들고 가 미술천재라고 추천하였는데 심사를 통해 최종 합격, 파격적으로 소학교졸업생이 중앙민족학원에 입학하게 되였던것이다. 전죽송선생은 지금도 설명절이나 교사절이 되면 당시의 담임교원이였던 최경숙선생님을 찾아뵙고 덕담을 나눈다고 한다.

1946년 연길현 룡정진에서 개인사진관을 경영하던 아버지 전학준(1923-2002)의 맏아들로 태여난 전죽송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전학준은 소학교를 졸업한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사진관들을 옮겨다니면서 일했고 룡정중앙사진관에서 일할 때는 일본인 데라모도 쇼이찌(寺本正一)와도 함께 학도공으로 일한적이 있었다(이때는 일본이 이미 투항한후였는데 쇼이찌가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전학준으로부터 사진기술을 배웠다고 함). 자영업을 시작한것은 일본이 투항한후인 1946년경이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력때문에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전학준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해방전에 사진관을 경영하였으니 자산계급 자본가로, 일본인과 함께 일했으니 일본특무라는 혐의를 받았고 그 때문에 증명인의 인장까지 박힌 증실재료를 써야 했던것이다.

자본가, 일본특무로 몰렸던 전죽송선생의 아버지 전학준(1954년).

문화대혁명이 끝나서야 엄중한 력사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받고 터무니없는 모자를 벗었지만 전례없던 그 시기 한사람한테 력사문제가 있으면 그의 자식들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민족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예과와 본과를 마친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고 새로운 예술인생을 꿈꾸던 전죽송도 입당할수 없고 주변사람들의 차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그때 고향에 돌아올 결심을 내린 하나의 원인으로 되였다.

1976년 연길현문화관(현재의 룡정시문화관)에 조동된 전죽송은 무대그림과 포스터제작을 하는 한편 조선족들의 생산활동과 생활모습을 주제로 하는 미술, 촬영작품을 대량 창작하여 연변미술계와 촬영계의 중시를 받게 된다. 1978년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되여 2006년 퇴직할 때까지 그는 미술, 촬영편집으로 일하면서 사업의 수요와 미술, 촬영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수천점의 미술, 촬영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국가급화책인 《중국민족》, 《중국소수민족》편집에 참여하였으며 화책《연변》을 비롯한 많은 미술, 촬영도서를 편집출판하였다.

아버지 전학준의 력사문제가 해명된후인 1982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전죽송선생은 선후로 연변촬영가협회 비서장, 부주석 등 사회직을 맡고 연변의 촬영사에 큼직한 한페지를 남겼다. 1986년에 우리글로 된 첫 촬영리론저서 《촬영기본원리》를 출간하고 당해에 있은 제1회 민족대가정미술촬영전에서 작품 “부지런한 사람이 봄을 먼저”라는 작품으로 동상을 수상하고 전국봄철채색촬영전에서 “봄비 내리는 강남”으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후 카나다, 한국 등 국내외의 촬영전에 많은 작품들을 출품하는 한편 1993년에는 중국조선족 촬영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촬영전을 개최하고 지난해 여름에는 연변대학미술학원에서 “고향정”촬영전을 개최하였는데 그번 촬영전의 작품중 33점이 제1회 “중국민족영상지” 촬영대전에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입선되였으며 중국민족박물관에 영구 수장되였다.

1995년 훈춘시경신진회룡봉촌농민들과 함께(오른쪽 두번째 전죽송).

“기실 내 성격이 조용하고 붙임성이 좋다고들 말하지만 나처럼 특수한 년대에 특수한 가정에서 태여난 많은 사람들은 남들앞에 나서서 제노라 할 처지가 못되였단 말일세. 대신 자기 할 일만 수굿이 하였지. 하다보니 뭔가 남게 되더라구.” 그는 자기일을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한다.

전선생은 사업상관계로 농촌에 많이 내려갔고 농촌마을에 가면 마음 착한 농민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였다. 기음철이면 그들과 함께 기음을 매고 모내기철이면 그들과 함께 벼모도 꽂으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하기에 농민들은 환갑이나 결혼때면 허물없이 그를 불렀고 그는 그 기회에 조선족농민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속에 담겨진 농촌농민들의 형상은 모두 그렇게 창작된것이다. 하기에 그의 작품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부동한 력사시기 연변의 사회실태를 잘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반일의사의 외증손자, 저항운동가의 손자, 생계를 위한 자영업자의 아들로 태여나 오직 예술을 향한 추구를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부동한 력사시기를 굳건히 그리고 조용히 달려온 전죽송선생의 이야기가 중국조선족사회가 걸어온 특수한 력사의 편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