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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47]민속문화를 만들어가는 녀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1-24 23:05:38 ] 클릭: [ ]

작품 "세배"를 만들며

그녀의 위챗명은“한지공예작가”였다. 위챗공예모멘트에 드물게 나마 그녀의 작품이 오르군 하였다. “한지공예”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저으기 호기심이 동해 창을 열어보았더니 그토록 생동하고 정감이 넘치는 민속세계가 펼쳐질줄이야!

기구한 운명 억척스런 도전

작품에 반해 찾아본 작가는 50대중반의 3급 지체장애인 여련옥(余连玉)씨였다. 길림성 서란시 서교향 자경촌에서 나서 자란 그는 어린시절 소아마비에 걸려 심한 장애를 겪으면서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마을의 책이란 책은 다 얻어들여 읽었고 집안 뜨개질과 바느질은 도맡아 하면서 손재간을 키웠다.

결혼후에도 손재간을 밑천으로 조선족들이 즐겨입는 옷가지들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300세대도 넘던 고향마을이 언젠가부터 한집 두집 해외로, 연해지구로 떠나고 마을에는 로인네들과 장애인들만 남게 되면서 살길이 막막해졌다.

컴퓨터를 스승으로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가야 살길이 나질것 같아.”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15년전에 친구의 도움으로 연길로 이사와 교외에 세집을 맡았다. 고리대를 맡아 자그마한 슈퍼를 임대하고 앞마당에는 편직물기기며 수놓이기계를 마련해놓고 들어서는 손님들의 각종 수요를 만족시키며 영업을 벌려나갔다.

그런데 빚도 갚고 자그마한 집도 사놓을만 하니 집식구가 크게 앓으면서 번돈을 몽땅 병치료에 밀어넣다나니 허망에 나앉을 처지가 되였다. 그녀는 하는수없이 세집값이 싼 훈춘쪽으로 이사갔다. 하지만 일감을 쉽게 잡을수가 없어 다시 연길로 올라왔다. 늘 교외쪽으로 세집을 잡다보니 자리를 잡을만 하면 또 파가이주지역에 들군하여 결혼하여 지금까지 40번도 넘게 이사를 해온 그녀는 “지금도 세집에 살고있다.”며 “희한하게 살아온” 이왕지사를 허구픈 웃음으로 날려버린다.

“나의 이야기”, “우리 마을 이야기” 를 담아

언젠가 친구는 그에게 지점토공예를 추천하였다. 지점토로 만화그림이며 민속공예품을 만들면서 상품화를 시도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2008년에 집안 조카가 놀러왔다가 “컴퓨터에 들어가보면 세상만사를 다 알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 학교"

돈을 꾸어 1000원짜리 중고컴퓨터를 사놓고 전원을 켜는것부터 자기 손으로 터득해가며 지점토공예자료를 찾아 읽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공예창에 뜨는 한지작품에 눈길이 닿는 순간, 그는 그만 넋을 잃고말았다. 아예 부드럽고 질긴 닥종이로 만든 민속공예작품들에 반해버리고말았다.

허나 한지는 어디서 어떻게 구입할수 있는지. 그는 대화창에서 친구를 하나 둘 사귀면서 장백산인삼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에게 인삼을 사서 부쳐주고 대신 한지를 요구하였다. 어떤이들은 “열심히 사는 당신을 응원합니다!”라고 하며 무상으로 한지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그녀는 온갖 상상과 창의력을 짜내여 점점 사라져가고있는 아름다운것과 그리운것들을 작품속에 그렸다. 먹는것이 귀한 세월에도 어쩌다 찰떡을 치거나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담을 넘어 음식그릇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고향정, 못다 마친 학교, 지금은 형체마저 볼수없이 사라진 마을학교가 그리워 “학교”를 만들었다. 교실에는 책상가운데에 줄을 그어놓고 넘어오면 벌을 준다고 떠벌이는 남학생과 치떠보고있는 녀학생, 녀학생의 긴 머리태를 끈으로 걸상에 매놓고있는 작난꾸러기… 온갖 동심의 걸작들이 살아움직이고있다.

"리발"

그 시절 아버지의 리발가위는 사발을 엎어놓은듯 늘 딸의 머리를 썩둑해놓아 며칠이고 투정부렸던 “슬픈” 기억, 새끼토리를 가득 박아실은 밀차가 시장거리를 들어서는데 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언니들은 뒤에서 밀고, 시장가에는 또 오색의 민족복장이 줄느런히 걸려있는가 하면 고기매장앞에는 새끼줄에 돼지갈비를 매여들고 가는 남정네들이 싱글벙글이다.

남정네들이 떡돌우의 하얀 떡무지를 향해 떡메를 힘껏 휘두르는데 떡메가에 하얀 떡꽃이 피여있고 소래물로 누기를 얹는 엄마뒤에 아이가 긴 가래떡을 입에 물고 서있다. 떡소래를 이고가는 아낙네의 뒤에는 강아지가 치마꼬리를 물어당기며 따르고… 실로 풍성한 농촌민속축도가 아닐수 없다.

“아름다운 추억 함께 공유하고싶어요”

“한지작가”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지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한때는 작품들을 그대로 창고에 무져두었다. 시장가에 내놓을 자신이 없었던것이다. 연길한백이 개업하면서 무상전시를 요청하는이가 있어 양지 환한 매장에 반듯하게 작품들을 받쳐올려놓으니 보는이들마다 “우와-!”하며 탄성이다.

어느 이름 모를 한 할머니는 자식들과 손군들을 데리고 일곱번이나 찾아와 감상하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어쩌면 표정들이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을수가 있을가!” “꼭 마치 우리 마을 같구먼!”

가는 정 오는 정

미세한 세절까지에도 신경을 도사려가며 완성한 작품들은 소박하고 진실하며 은근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현대화생활속에서 점점 색바라져가고있는 인정세태와 미풍량속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추억속에 향수를 달랠수 있는 문화적품위가 안받침되여있기때문이였으리라.

그녀는 앉은걸음으로 또는 기여가면서 침대모서리를 잡고 일어서서 컴퓨터에 마주앉는다. 미술을 배운적도 없는 그로서는 밤낮으로 사색하고 궁리하면서 작품에 대한 고안을 무르익힌다.“돈도 안되는 쓸데없는 짓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나무람하던 남편 담재씨도 이제는 어딘가에서 꼬부랑 막대기도 주어다 “기다림”이라는 작품속의 허리 굽은 할머니의 손에 쥐여놓기도 하고 달구지며 지게도 만들어 “농가” 뜨락에 세워놓기도 한다.

여련옥씨가 멀어져간 “고향의 이야기”를 추억하며 만들어낸 조선족세시풍속도는 연길시공원소학교며 연남소학교 등 학교들의 민속교육에 응용되기도 한다. 특히 고속철이 개통되면서 그녀는 운수대통의 기회를 맞게 되였다. 연길서역이며 룡정역 전시구에 연변의 조선족특색을 살리기 위한 민속작품들을 진렬하면서 그녀의 민속계렬작품들을 있는대로 거둬갔다.

그네놀이

그의 작품은 문화적가치가 인정을 받아 “앞으로 작품을 만드는족족 몽땅 요구하겠다.”고 나서는 단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꿈이 따로 있었다.“그동안 여러분들의 칭찬과 응원에 힘을 얻었고 저의 작품을 흔상하면서 행복해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에서 신심과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이제부터는 작품을 만드는대로 전시를 잘해놓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내내 행복하고싶습니다.”

그녀는 부풀어오르는 꿈을 안고 하루 한시도 탕개를 늦출세라 일손을 다그치고있다.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신명나할 때 그로 인한 성취감에 마음은 더없이 설레인다며 60세를 바라보는 지금에야 행복이 뭔지를 알것같다고 말하는 여련옥, 사람이 웃으며 살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고 한다. 

인생은 긴 려정이라고 한다. 일단 려행길에 들어선바 하고는 뜬구름을 넋 놓고 바라보며 흘러가는 세월에 떠밀려 가기보다는 황홀한 꿈을 이루는 길에서 반짝이는 별도 바라보고 꽃향기도 맡아보면서 즐겁고 신나고 보람있게 갈것이라고 그는 신심가득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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