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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14]상해에 남긴 최음파의 발자취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6-27 13:16:53 ] 클릭: [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14)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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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상기 여러 기사들에서 최음파로 알려진 한룡권(한용으로도 알려짐)은 중앙혁명근거지를 돌파한후 상해 프랑스조계지 도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陶爾斐斯路希德里14号)에 류숙하며 활동하다가 1935년 7월 10일 새벽 거주지에서 상해 일본령사관 경찰서측에 의해 체포되였음이 알려진다. 상해 프랑스조계지 도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는 오늘의 남창로(南昌路) 즉 중경남로(重庆南路)와 안당로(雁荡路) 구간이라고 한다

(최음파는 일찍 상해체류시 상해한인지부와 상해인성학교 등지에서 활동하지 않았던가 !)

《최음파평전》 집필 막바지에 들어선 2016년 3월 7일 오후 상해인성학교(仁成学校)자리와 프랑스조계지 원 도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 자리를 찾아 상해 현지답사길에 나섰다. 오후 2시 소흥을 거치는 녕파-상해행 고속철은 한시간 20분 정도로 상해 홍교역에 들어섰지만 상해시 포동신구 룡양로(浦东新区龙阳路)구간에 류숙지를 잡으니 이미 오후 4시가 넘는 시점이다.

이튿날 아침식사후 지하철 룡양로역에서 2호선에 올랐다. 꽃피는 새봄 맞은 3.8절이라지만 찬비가 내리며 하루사이에 기온이 령상 23도로부터 10도 이내로 곤두박질한다. 하건말건 내려야 할 황포구 인민광장역은 일곱 정거장 밖이고 번화한 륙가취(陆家嘴)와 남경동로 사이에서 황포강을 넘어서야 하였다. 인민광장서 1호선을 바꾸어 타니 다음 지하철역이 찾으려는 황피남로(黄陂南路)역. 황피남로역 출구 1에서 나와 도보로 먼저 부근의 흥업로(兴业路) 76번지에 위치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 회의장소를 찾았다. 1차 당대회 회의장소는 당 창건 95돐을 맞으며 6월 30일까지 정비중이여서 참관할수가 없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성스런 곳이여서 그저 지나칠수가 없다. 동행한 아들애가 우산을 들어주어 바깥모습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을수가 있었다.

상해 흥업로(兴业路) 76번지에 위치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 회의장소.

1차 당대회 회의장소 가까이가 “대한민국림시정부유적지”다. 상해림시정부 유적지가 마당로 306롱 4번지(马当路306弄4号)일 때 홍군음악가 최음파의 발자취 어린 상해인성학교 옛터는 마당로 404롱 협성리(协盛里) 1번지로 나타난다. 림시정부 유적지나 인성학교 옛터는 모두 마당로 한길에 위치하고 306롱이나 404롱 사이는 가까운 거리여서 쉽게 찾을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다. 비 내리는 길거리를 지나기가 싫어 마당로 북에서 남으로 왼쪽 길가를 따라 걸으니 마당로 383롱이 바로 눈앞에 환히 안겨진다. 조금 더 나아가면 404롱에 이르겠지 하지만 404롱은 좀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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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수없이 마당로 383롱 구간으로 돌아섰다. 길가에서 신문이랑 문전송달하는 한 중년남자를 만나 물으니 마당로는 좌우번호가 서로 다르단다. 이쪽 마당로 구간이 홀수(单数)일 때 길건너 마당로 구간은 짝수(双数)로 되였으니 404롱이면 응당 마당로 오른쪽 구간이여서 길 건너편에서 찾아야 한다고 동을 단다. 고마운분이였다. 마침 383롱 구간너머가 410롱, 408롱 구간이여서 무척 신났다.

그런데 또 조바심이 든다. 길건너 마당로 구간이 “상해시 황포구 외지로동력관리소”로 된 410롱이여서 인젠 곧 찾는다고 생각하는데 410롱 다음 408롱까지 보이고 더 보이지 않는다. 408롱 다음은 “十”로 이루어진 네거리로 동강난다. 길가 당지 보안과 물으니 네거리너머 구간은 현대화 고급사무청사로 이루어진 복흥(复兴)광장 구간으로서 옛 404롱 건물들은 언녕 사라진 상태라고 알려준다. 절강 소흥에서 불원천리 달려온 상해인성학교건만 참담한 실망만 안기는 실정이 안타깝기만 하다.

알고보면 상해인성학교 옛터로 되는 마당로 404롱 협성리 1번지도 원래의 위치번호가 아니였다. 원 위치번호는 마당로가 아닌 마랑로(马浪路) 협성리 1번지로 되여있었다. 1926년에 이곳에 교사가 들어서서 1935년 일제측의 핍박으로 페교될 때까지 위치번호는 줄곧 마랑로 협성리 1번지로 알려졌다.

상해인성학교 옛터-마당로 404롱 협성리(马当路404弄4号协盛里) 1번지에 이르니 옛터는 자취를 감추고 네거리가 막아나선다.

상해인성학교는 1916년 9월 1일 상해 홍구(虹口)지역에서 조선인(한인) 기독교인이 세운 상해조선인기독소학교로부터 시작된다. 이듬해 1917년 2월부터는 인성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북풍로 재복리(北丰路载福里)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1919년 4월 상해에 림시정부가 수립되면서 학교의 관리운영은 림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으로 넘어서고 인성학교도 원래의 홍구지역에서 점차 림시정부 및 교민단과 가까운 프랑스조계지로 이전하게 되였다. 그때가 우에서 스친 1926년이다.

상해인성학교는 이같은 조선인학교다보니 독립운동가 계렬동지들은 물론 사회주의자, 중국공산당 계렬인 양림, 무정, 장세걸 등도 모두 이 학교를 자주 드나들게 되였다.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일본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는 그 기본취지는 서로 같았다. 하기에 후일 홍군음악가로 이름난 최음파도 한용이란 부름으로 양림, 무정, 장세걸 등과 어울리며 인성학교를 주요 활동지의 하나로 많이 다니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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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인성학교는 학교가 존재한 근 20년간 선후로 북풍리 재복리, 날비덕로 우기리(捺斐德路友记里) 2번지, 마랑로 협성리 1번지 등지 이전과정을 보인다. 그중 거의 절반시간에 맞먹는 1926년부터 1935년까지 그 시절 마랑로로 불려진 구간 협성리 1번지에 자리잡았다. 마랑로의 시초는 프랑스조계지가 1898년에 수건한 길-랑산로(狼山路)로서 1906년에 프랑스 상해주재 총령사관에서 배래니몽 마랑로(白来尼蒙马浪路)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마랑로”라고 불렀다. 1946년에 이르러 마랑로가 마당로(马当路)로 바뀌여졌다.

그런 마당로 404롱 협성리 1번지가 오늘날 더는 보이지 않는다. 력사속에 영영 사라져 버리였다. 하지만 상해인성학교 관련 중국측 문자자료가 없지 않다.

“-고려학교는 보통의 석고문(石库门) 집으로서 일찍 상해로 온 한국어린이들이 여기에서 학교에 다니였다. 자그마한 뜨락에 롱구대를 세웠다. 이 롱구대는 학교가 허물리는 그날까지 줄곧 세워져있었다. 여기서 배운 어린이들은 이미 백발이 성성한 로인으로 되여 그들은 자기들 후대들에게 희망을 기탁하면서 여기에 와서 뿌리를 찾도록 하였다. 여기가 허물리기전 나의 옛 동료인 림선생이 이곳에 류숙하였다. 림선생은, 자기 집은 멀리 한국사람들이 늘 찾아와 매 하나의 세절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사진 찍어서는 돌아가 로인들을 위로하였다고 말하였다.”

20세기 20년대 상해인성학교 옛터 사진(자료사진)

“상해 옛것을 그리는 넷”(上海怀旧吧)에 오른, 마당로 404롱 협성리 1번지와 상해인성학교를 잘 아는 상해사람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회고문의 한단락이다. 이 회고문은 도시발전으로 력사속에 사라진 고려학교-인성학교를 절절히 그리는 회고가 그대로 묻어나 깊은 감명을 안겨주고있다.

상해인성학교에 이어 찾아야 하는 곳은 1935년 봄이후 최음파가 홍군비행사 진덕근과 같이 류숙하며 지하항일활동을 벌리던 프랑스조계지 도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 오늘날 도이비사로와 희덕리 14번지는 찾을수 없어도 상해의 중경남로와 안당로 구간 남창로라도 찾고싶다. 여기 남창로가 그제날 도이비사로 구간이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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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갈수록 심산이라고 중경남로와 안당로 구간에 이르러 만나는 사람마다, 길가 보안들과 물어도 도이비사로를 아는 사람이 없다. 정오가 가까와오면서 줄창 내리던 비는 강남의 한겨울을 방불케 하는 매서운 비바람으로 변해 강타하는데 강남생활 10년속에 처음 맞띄우는 찬 비바람은 죽을놈은 나오라고 소리지르는듯싶다. 꽤나 넓은 공지를 가득 채우며 활짝 피여난 흰 목련화랑, 연분홍 목련화랑 유정스레 멀리 소흥에서 달려온 나그네를 맞아주고 있었다. 상해의 새봄을 알리고있었다.

비바람속 중경남로 따라 걸어보았다. 비바람속 안당로 따라 걸어보았다. 골목, 골목길마다 현대식 건물이 아닌 옛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골목들이여서 지난세기 30년대 중반 시절에 들어선듯싶다. 최음파랑 조용조용히 골목길을 누비는듯싶다. 그제날 골목길들 곳곳이 여기가 다이비사로 희덕리라고 소리지르는듯싶다.

마당로 404롱을 덮어버린 네거리너머 구간은 현대화 고급사무청사로 이루어진 복흥(复兴)광장 구간.

시간은 조용히 흘러만 간다. 벌써 오싹오싹 떨려나는 비속을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어느 골목이 딱히 프랑스조계지 구간 다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 구간인지 알아낼수가 없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간다. 인젠 귀가길에 올라야 했다. 돌고돌다가 부근 지하철역을 찾으니 아들애는 아까 지하철에서 내린 역이라며 기뻐 야단이다. 보매 처음 내리던 황피남로역 1호출구가 옳았다.

“허, 허~” 저도 몰래 웃음이 터졌다. 지하철 황피남로역 1호출구로 나온후 그리도 많은 골목길을 누비며 허둥거려보았는데 방향 모르고 돌고돌다가 귀가길에서 찾은 곳이 황피남로역 1호출구라니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이리도 묘할수가 있을가. 돌고돌아 원점으로 돌아온 우리 부자간이였다. 이 사실은 옛날 도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가 오늘날 상해시 로만구(卢湾区) 황피남로 구간이거나 가까운 곳임을 시사하고있었다.

황피남로역과 인민광장역에서 지하철 1호선에 오르고 2호선에 오르면서 1935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밝힌 “일본령사관 경찰서에서는 때를 다투어 프랑스조계의 당국의 응원을 얻어 10일 새벽, 그의 잠복한 곳을 습격하여 그들을 체포하였다 한다.”는 구절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도리대로 말하면 프랑스조계지가 여느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최음파와 진덕근이 중앙혁명근거지 돌파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후 다시 프랑스조계지에 숨어들었는데 그만 프랑스조계지 당국의 중시에 걸려들었다. 왜서 일제측도 아닌 프랑스조계지 당국이 자기들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땅에서 조선인을 물고 늘어질가? 그 내막을 알자면 상해 프랑스조계지 력사속으로 들어가야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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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략적으로 보는 상해 프랑스조계지 력사는 19세기 40년대로 거스른다. 19세기 50년대에 이르러 워낙 작은 부두가에 지나지 않던 상해땅에 영국인거주지, 미국인거주지, 프랑스인거주지와 상해현성이 일어서면서 점차 영국조계지와 미국조계지가 합치여 공공조계지(公共租界)로 바뀌운다. 1869년에는 프랑스조계지내에 행정조직이 설립되면서 프랑스조계지는 독립적인 구역으로 발전하여간다. 공공조계지와 프랑스조계지, 상해현성의 형성국면이다. 프랑스조계지 최고권력자는 프랑스 상해주재 총령사이고 행정기구는 공동국(公董局), 공동국 아래에 경찰서를 두니 이 경찰서가 조계지내 치안관리를 맡아나선다. 경찰서는 조계지내에서 마음대로 체포하고 구금할 권리를 갖고있었다.

1910년 일본침략자들이 삼천리강산을 강제적으로 삼켜버린후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조선사람들이 동방의 대도시로 발전한 상해로 찾아들었다. 상해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이 격랑을 이루었다. 상해는 점차 조선인 항일독립운동의 주요기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상해 프랑스조계지당국은 상해림시정부와 조선인독립운동에 대하여 불간섭정책을 펼친데서 프랑스조계지를 기지로 활동하는 항일운동가들이 많아졌다. 20년대 중반 상해한인지부에서 활동하던 최음파 등이 프랑스조계지내에 류숙지를 잡은것도 그러했다.

최음파 관련 상해 프랑스조계지 도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는 찾을수 없는데 찬바람속에서도 길가 공간지대에 목련화가 피여 길손을 반긴다.

1932년 4월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이달 29일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园)에서 윤봉길의거(尹奉吉义举)가 터지면서 조선인들에 대한 프랑스조계지 당국의 정책은 4월 29일을 분수령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정책은 불간섭정책이라면 후기정책은 일본침략자들을 협조하면서 조선인항일운동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으로 바뀌였다.

하면서도 어인 영문인지 1935년 봄이후 최음파와 진덕근은 상해 다른 곳도 아닌 프랑스조계지로 숨어들었다. 최음파랑 조계지당국의 정책이 변한것을 몰라서였을가. 아니면 알면서도 익숙한 고장이라고 다시 들어섰을가. 지금에 이르러 그 원인을 나름의 짐작에 맡기는수 밖에 없는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최음파랑 1935년 7월 10일 새벽에 그 시절 프랑스조계지내 다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에서 일본령사관 경찰서 놈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는가. 이는 최음파와 진덕근 등이 다이비사로 희덕리 14번지에서 조용히 살아가지 않고 남모르는 혁명활동에 계속 투신하였음을 단적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1935년 7월 이후 그 시절 《동아일보》 여러 기사들을 보면 상해에서의 최음파의 활발한 활동은 프랑스조계지 당국의 중시를 자아냈고, 이자들이 최음파의 거처와 내막을 일본령사관측에 알리였음이 환히 드러난다. 다름아닌 프랑스조계지 당국이였다. 귀로에서 시종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 다름아닌 이 일, 최음파의 홍군음악가생애는 1935년 7월 10일을 계기로 접어졌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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