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불멸의 발자취(52)—무한의 사적지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1-17 16:41:34 ] 클릭: [ ]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은 본격화되였다. 로구교사변을 통해 하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선후로 산서성 태원과 화북의 요충인 서주를 공격하였다. 1937년 9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115사는 림표, 섭영진의 인솔하에 평형관(平型关)에서 일본군 이다가끼사단의 1000여명 적을 섬멸하는 승전을 올렸다. 평형관섬멸전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된후 이룩한 첫 승리로서 전국인민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해주었다.

1938년 4월 정면전장에서 리종인(李宗仁)이 서주부근의 국민당군을 지휘하여 대아장부근에서 1만 1000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반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일본침략군은 화북을 점령하고 배길로 공격하여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고 중부도시 무한을 위협하였다.

(권립 교수) 《일제는 1938년 3월까지 화북을 거의 다 강점하고 화중지역의 상해, 남경까지 불바다로 만들고 남경에서 30만 민중을 학살한 남경참안을 빚어냈습니다. 1938년 7월부터 일제는 25개 사단으로 무한을 포위했습니다. 공격전이 개시되였습니다. 장개석의 부대는 뒤걸음만 쳤습니다. 중화민족이 가장 위험한 시기에 처한 이때 무한에 모였던 우리 민족 청년들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무한의 명루 황학루

황학루앞에서 아침체조를 하는 무한 시민들.

답사팀은 광주, 서금, 남창, 구강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구강에서 무한으로 출발하였다. 장강을 사이두고 구강시 바른편으로 호북성 소지진(小池鎭)에 닿았다. 버스는 구강시를 빠져나와 거창한 구강장강대교(九江長江大橋)를 건너 호북경내로 들어갔다. 무한까지 4시간 거리였는데 길량쪽은 산이 없고 모두 무연한 평지였다.

호북성 소재지인 무한은 예로부터 무한 삼진으로 불리웠다. 무창, 한구(漢口), 한양(漢陽) 세진의 통칭인것이다. 만리 장강이 무창과 한구, 한양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漢水)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과 한수에 다리가 놓여져 무한 3진이 한도시로 되였다.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 중부의 중요한 수륙교통과 문화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때문에 많은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로 간주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 이후 중국의 혁명중심지는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졌다.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와 혁명투쟁에 참가하였다.

20세기 20년대초에 무한에는 벌써 중한호조사가 있어 조선이주민들과 중국혁명지사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민이 조계지를 회수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국혁명이 고조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이곳에 모여왔다. 의렬단은 단장 김원봉을 따라 본거를 무한에 정하고 조직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37년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혁명자들은 다시 무한에 모였다. 그들은 중국의 국공합작정세에 비추어 여러 당파들의 대단결을 주장하였고 표면적으로나마 통합을 이루었다. 그 산물이 바로 무한에서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립이였다.

우리는 무창에서 중앙인민방송국 무한 기자소의 소개로 신의대주점(新宜大酒店)에 투숙하였다. 호텔부근에서 점심식사를 마친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때문에 먼저 호북성 당사판공실(黨史辦公室)에 찾아가 관련 단서를 찾아보기로 하였다.성정부는 무창의 홍산로(洪山路)에 있었다. 기자증을 보이고 당사판공실의 관련 일군들을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온 영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바란다고 하자 관련 일군들이 여러가지 관련 자료를 내놓았다.

차를 마시며 열심히 자료를 뒤져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참고될만한것이 없었다. 연구일군들과 문의해보아도 조선의용대에 관하여 잘 모르고있었다. 책에서 본 생각은 나지만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는것이다. 우리가 관련 자료들을 뒤질 사이에 연구원은 전화로 이곳저곳 문의하였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는 미안하다면서 무한박물관에 가서 문의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사전에 생각해보지 않은것은 아니였지만 조선인 반일투쟁사에 대해서는 사실 중국 연구원들의 연구가 너무나도 빈약하였다. 광주의 황수생연구원의 말처럼, 지금 연구일군들은 연구과제를 선택할 때 언제나 쉽게 전문가들의 호감을 살수 있고 또 성과를 낼수 있는 부분을 택하기때문에 조선반일투사들과 관련된 연구과제는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 이 과제로 직함이나 학위를 따기 힘들고 연구성과를 내기 힘들다는것이다. 중국 관련 연구분야에서 우리 반일투쟁사가 많이 홀시되고있는데 대해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이 더 커졌다.

중국내 조선인 반일투사들의 력사와 종적은 우리가 답사하고 찾아야 하고 연구해야 하였다. 방송기자인 우리는 비록 전문 연구일군은 아니지만 조선민족 투쟁사를 배우고 이를 널리 선전할 용의가 있었다. 중국 조선족에게 알려주어야 할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우리 민족에게 객관적이고 보다 정확한 력사를 알려주어야 하며 또 중국내 기타 민족에게도 우리 민족의 자랑찬 력사를 널리 선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전화약속으로 중남재경대학(中南財經大學)의 원계성(袁繼成) 교수를 찾아갔다. 중남 재정경제대학은 우리가 투숙한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학교 교원사택을 찾아가 전화하니 원교수가 만면에 웃음을 담고 마중나왔다. 원교수 저택은 생각보다 헐망하였다. 아파트는 오래된 건물이였고 방도 세개였지만 부인이 안 계시는지 지저분하였다. 그러나 교수는 소탈하게 웃으면서 아무것도 개의치 않아하였다.

원계성교수(오른쪽)와 함께.

교수는 중화민국사와 국민혁명정부 무한시기, 항일전쟁시기의 무한력사에 대한 연구가 깊은분이였다. 그는 다년간 서류국, 각종 문헌, 신문자료들을 찾으며 연구를 깊이 했다. 그는 중경시기 국민당 자료들을 가득 필기한 노트와 자기의 론문을 꺼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조선혁명자들은 무한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중국의 세개 력사사건에 개입하였다. 하나는 한구 주민들이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는 사건이였다. 시민들의 반제운동이 한껏 고조를 이루었을 때 영국, 일본, 프랑스 조계지의 인디아고용인들이 윁남, 조선인들과 련합하여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혁명가 권준이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의 조선인 대표로 출석해 대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는 기재도 있었다.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에 참가한 조선인들은 영국 조계지 회수를 적극 도와주었고 한구 시민들의 시위에 동참하였다. 원교수는 그때 조선인들의 영향은 비교적 컸다고 평가하였다.

다른 하나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를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조직을 뭇고 중국 대혁명에 적극 참가하였다. 학교측에서는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이전시키고 무한에서 전국을 상대로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조선인 청년회에서 전국 각지에 널린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6기로 입학하였다.

또한 리제심이 광주에서 공산당을 탄압하자 광주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왔다. 김원봉이 거느린 의렬단요원들도 이 시기 무한에 와서 활동하였다. 원교수는 이때 조선혁명가 최용건도 무한에 왔다고 하지만 분명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후 중국군 장교로 있던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많은 조선청년과 학생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의렬단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들과 군관들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한국혁명청년회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義杓), 리검운(李劍雲), 오세진(吳世振), 리우각(李愚慤), 로세방(勞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軍事政治學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陳公木), 진갑수(陳甲秀), 사검인(史劍仁), 안동만(安東晩), 류광세(劉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學)과 남호학병단(南湖學兵團),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4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한국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 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그후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청년회 간부진과 회원들은 다시 무한에 모여 조선의용대 성립의 기간 력량으로 되였다.

세번째로는 항일전쟁시기 무한함락을 앞두고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다시 무한에 모여 조선의용대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중국 동북, 상해, 남경이 모두 선후로 일본침략군에게 강점되였다. 당시 국민당은 중경에 정부를 옮겼다지만 많은 기관과 사회단체들은 무한에 체류하고있었고 외국사절들도 무한에 있었다.

일제와 싸우기 위해 적극 참군하는 중국청년들.

남경이 함락된후 국민당의 거물급 인물들인 장개석, 왕정위, 공상희(孔祥熙), 풍옥상이 무한에 있었고 공산당 대표로 왕명(王明),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등이 무한에 있었다. 조선교민들은 모두 무한을 보위하는 항전에 적극 참가하였다. 원계성교수는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0월 무한이 함락되기까지는 국공합작이 가장 좋은 시기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중국정세에 비추어 조선혁명자들의 좌우익 단합도 이 시기 비교적 성과가 컸다고 주장하였다. 그 표징으로 조선의용대의 성립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 무한에는 조선청년 전시봉사단이 있었다. 봉사단의 조선청년들은 병사들을 위문하고 난민을 구조해주었다. 1938년 4월 10일, 한구에서 조선민족통일전선을 뭇고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이라는 반월간을 출판하였다. 조선민족전선운동이라는 기구도 있었다. 간행물 주필은 김규광과 류자명(柳子明)이였다.

잡지는 중국의 항일을 적극 지원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노역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인민과 함께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일본침략군이 곧바로 무한을 강점하게 될 무렵, 조선청년들은 무한에서 단연히 조선의용대를 성립하여 무한보위전에 투신하려 하였다.

원계성교수는 또 조선의용대 성립일에 관련해 자기의 주장을 내놓았다. 연구를 거쳐 조선의용대는 10월 10일에 성립되였고 신문에 피로된것이 10월 13일이라고 하였다. 이날 원계성교수에게서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확인하게 되여 성취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한에도 이처럼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를 잘 알고있는 교수가 있어 기뻤다.

원교수와 작별하고 호텔로 돌아오고 저녁에는 무한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장강에 정박한 륜선들과 장강대교, 강기슭의 유보도, 각이한 옛 청사들이 모두 네온빛속에서 한결 황홀해보였다.

/김성룡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윤세미용성형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