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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50)—김원봉과 남경의 사적지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0-09 14:59:20 ] 클릭: [ ]

1930년대 남경은 중국 관내 조선인 혁명자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김구와 한국림시정부가 남경에 와서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하였을뿐만아니라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도 남경으로 본부를 옮겼다. 김원봉은 대일전선통일을 이룩해내고 각파 혁명가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건하였으며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훈련시키면서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였다. 중국내 수많은 조선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이 김원봉과 김구의 호소에 따라 남경에 규합되였고 새로운 투쟁력량을 형성해나갔다.

장강하류평원중부에 위치한 남경시는 력사적으로 금릉(金陵), 건업(建业)으로 불리우다가 14세기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남경으로 불리게 되였다. 기원전 472년 월왕(越王) 구천(勾践)이 와신상담(卧薪尝胆)하여 오(吴)나라를 멸망시킨후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도시가 생기게 되였다. 그후 력대 봉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고 근대에 와서는 국민정부가 이곳에 수도를 정했다.

중국의 가장 큰 하천 부두를 가지고있는 남경은 장강수로를 통해 중부와 서부의 무한, 중경에 이를수 있고 동쪽으로는 상해를 거쳐 바다로 진출할수 있다. 뿐만아니라 남북으로 륙로교통이 발달하여 강소성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으로 되고있다.

남경은 자금산(紫金山), 현무호(玄武湖), 진회하(秦淮河)를 비롯해 산과 호수, 강을 가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송나라때의 유적이 있는 현무호, 전형적인 강남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진회하 그리고 자금산에 위치한 중국 근대의 혁명선구자 손중산의 릉원인 중산릉(中山陵)은 많은 관광자들이 선호하는 명소이다.

답사팀은 남경시 지명판공실에 찾아가 옛 지명과 지금의 지명을 대조해보고나서 의렬단본부 옛터인 호가화원(胡家花园)으로 향했다.

남경에서의 조선인은 대체적으로 진회하이북의 도시남부인 지금의 남경시 백하구(白下区)에서 거주하고 활동하였다. 백하구의 집경로(集庆路)와 명양로(鸣羊街)부근에는 남경의 유명한 원림인 우원(愚园)이 있다. 우원은 명나라때 중산왕(中山王)의 놀이터였는데 청나라시기에 와서 호(胡)씨 집안이 이곳에 원림을 만들면서 생겨났다.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땅을 파서 늪을 만들었으며 각가지 진귀한 화초를 심고 정교한 루각을 수십채 지어 이곳은 유명한 원림으로 변했다. 우원은 청나라말기에 공원으로 개방되여 더욱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호씨집안이 만든 화원이였기때문에 현지인들은 우원을 그냥 《호가화원》이라고 불렀다.

1932년 남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백하로(白下路) 명양가에 위치한 호가화원부근의 가옥에 거처를 정하고 의렬단 주요간부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던것이다.

약산 김원봉.

김원봉(1898-1958)은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府北面) 감천리(甘川里)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호는 약산(若山)이고 선후로 최림(崔林), 진국빈(陈国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국권을 상실한 조선이 일제의 유린을 받고있는 참상을 목격해온 김원봉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을 큰 뜻을 품었다. 1916년 그는 중국에 건너와 선후로 천진 덕화학당(德华学堂)과 남경의 금릉대학(金陵大学)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후 김원봉은 무장항일의 뜻을 품고 중국동북에 세운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한편 뜻이 맞는 지사들을 규합시켜 11월 9일 길림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조선의렬단을 창단하였다. 김원봉과 윤세주(尹世冑), 량건호(梁健浩), 한봉근(韩凤根), 한봉인(韩凤仁), 김옥(金玉), 강세우(姜世宇), 리성우(李成宇), 서상락(徐相洛), 권준, 신철휴(申哲休), 곽재기(郭在骥), 량동선(梁东宣) 등 13명이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로 의렬단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의렬단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무너뜨릴데 관한 행동방침을 확정하였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렬단 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단재 신채호의 반림시정부 성토문을 적극 지지하면서 무력항쟁을 주창하였고 또 《조선혁명선언》을 의렬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면서 의렬단을 확대하였다. 20세기 20년대 의렬단은 선후로 부산,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도꾜 니주바시(二重桥) 폭탄의거, 상해 황포탄의거를 비롯한 의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고 동방피압박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1926년 김원봉은 최림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광주에 갔다. 단순한 의렬투쟁보다는 대중운동을 이끌고 자체의 군대를 조직해야 함을 깊이 인식한 그는 의렬단 단원들을 이끌고 황포군관학교 4기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는 한편 중국의 반제반봉건투쟁에 참가하였다.

1927년 국공분렬후 김원봉은 하룡부대에 입대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상해를 거쳐 북평으로 갔다. 북평에서 그는 공산주의리론가들인 한위건, 안광찬(安光瓚)을 만나 공산주의와 대중운동을 학습하였으며 레닌주의학교를 세우고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을 이끌었다.

1932년,김원봉은 더욱 많은 혁명자들을 규합하고 중국내 모든 반일지사들을 단합하여 대일통일전선(对日统一战线)을 형성하기 위해 남경으로 왔다. 남경에서 그는 진국빈(陈国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동학이였던 국민정부 고위관원인 황소미(黄绍美), 관린정(关麟征)과 련락을 달고 또 중국항일 구국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东北义勇军後援会)》, 《동북난민후원회(东北难民後援会)》의 지원을 받았다.

황소미는 아시아문화협회를 주도하였고 관린정은 국민군 제25군 군장이며 진포로(津浦路) 경비사령관이였다. 특히 동기생인 삼민주의력행사(三民主义力行社) 서기인 등걸(藤杰)의 도움이 컸다.

김원봉은 등걸을 통해 대일작전에 관한 의렬단의 다음과 같은 계획을 장개석에게 전했다. 첫째, 일본과 만주 요인을 암살하고 중요 기구를 파괴한다. 둘째, 재만 반일단체와 손잡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다. 셋째, 조선, 만주의 로동자와 농민계층에 심입해 혁명군 조직을 준비한다. 넷째, 지페를 위조하여 만주의 경제를 교란한다. 다섯째, 테로활동을 실행하고 물자를 확보한다. 장개석은 의렬단에 대한 지원사항은 삼민주의력행사에서 맡아보도록 하고 매달 3,000원을 활동경비로 제공할것을 지시하였다.

의렬단본부 옛터인 남경시 호가화원은 지금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다년간 정돈하지 않았던탓으로 쓰레기가 쌓이고 늪은 오염되여 악취를 풍겼다. 그리고 화원부근에 이따금 헐망한 가옥들이 보였다.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옛날에는 그럴듯한 건물이였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번지수가 없고 또한 비슷한 건물들이 많았기때문에 더욱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삼민주의력행사의 도움으로 중국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은 김원봉은 1932년 10월 20일 남경 교외의 탕산(汤山) 선사묘(善祠庙)라는 사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이때 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을 탕산에 세웠는데 훈련반은 6개대로 나뉘였다. 그 가운데서 6대가 바로 조선청년들을 수용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보안을 위해 교외에 학교자리를 정했고 대외로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6대로 지칭하였다.

탕산은 남경시동부 교외에 위치하였다. 답사팀이 남경시 탕산진에 가보았지만 지금 학교옛터에는 나무와 잡초만 무성할뿐 아무것도 없었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는 주변을 철사로 둘러막은 선사묘라는 사찰이 있었다. 사찰은 세개 건물로 되었는데 가운데 건물에는 신상(神像)이 모셔졌고 곁의 큰방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작은 방은 교관실로 사용되였다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사묘 종적은 찾을길 없고 빈 옛터만 남아있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가 학습했던 탕산림장옛터 돌비석.

탕산림장의 유물들로부터 여기에 선사묘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1932년 10월 개교되여 1933년 4월까지 제1기생 26명을 이곳에서 졸업시켰다. 학교운영은 김원봉과 의렬단 지도부가 담당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리집중(李集中), 신악(申岳), 김종(金鐘), 로을룡(卢乙龙), 박건웅, 권준을 비롯해 왕현지(王现之 리영준), 한일래(韩一来), 리철호(李哲浩)가 군사, 정치, 총무를 맡은 교관으로 있었다. 김세일(金世日), 윤세주, 리륙사(李陆史)를 비롯한 26명 학원이 제1기로 졸업하였다. 김세일과 윤세주는 후에 조선의용군의 주요간부로 항일전장에서 활약하였고 리륙사를 비롯한 많은 학원들은 각지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던중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1933년 9월, 학교는 강소성 강녕진(江宁鎭)에 옮겨 제2기를 운영하였다. 지금의 남경시 교부영(教敷营)에 자리를 정했다고 하지만 명확하게 확인할수 없었다. 1934년 4월까지 리원대(李元大), 문명철(文明哲), 리정순(李正淳), 관건(关键), 윤공흠(尹公钦)을 비롯한 55명 학원이 졸업하였다.

1935년 4월, 김원봉은 남경교외의 상방진(上坊鎭) 황룡산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를 교육시켰다. 1기와 2기를 졸업시켰던 탕산과 강녕진의 학교위치가 일제밀정에게 탐지되였기때문에 제3기는 남경에서 멀리 떨어진 상방진의 편벽한 산속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학원들이 학습하였던 남경시 교부영가두표시판.

남경시 교부영의 옛가옥.

남경시 상방진 황룡산의 천녕사 돌비석.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 옛터, 남경 상방진 천녕사

답사팀일행은 상방진 황룡산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제3기학원들이 거처를 잡았던 옛 절인 천녕사(天宁寺)가 지금도 남아있었다. 남경의 우화대(雨花臺)를 거쳐 남부로 30킬로메터 정도 가면 상방향(上坊乡)이 나타난다. 당시의 상방진은 지금의 상방향으로 변했고 황룡산도 장산(长山)이라고 했다.

상방향에서 얼마간 더 가서 산중 우묵진 곳에 이르렀다. 산은 가파롭지 않았지만 비교적 편벽하여 나무와 대숲이 우거져있었다. 우리는 탕산림장(汤山林场) 장산(长山) 작업터, 천녕사 작업대라는 글이 어렴풋이 새겨져있는 돌비석 두개를 발견하였고 평지쪽에 있는 낡은 절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공지를 둘러싸고 세면에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정면 건물에 《천녕사》라는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곳이 바로 당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 학원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였던 황룡산 《천녕사》였다.

왕통(王通), 한대성(韩大成), 호유백(胡维白)을 비롯한 36명 학원이 반년후인 1935년 10월에 졸업하였다. 제3기는 양민산, 윤세주, 리춘암(李春巖) 등이 정치교관으로, 김세일, 리상지(李相之), 신악이 군사교관으로 있었고 김두봉(金枓奉)이 조선의 력사, 지리를 강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서 김원봉은 국민당 삼민주의력행사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조선청년들을 양성하기에 힘썼다. 학원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면서 엄격한 정치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김원봉은 김구가 락양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자 그곳에도 조선청년들을 파견하였고 남경에 있는 중국중앙군관학교에도 분산적으로 조선청년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넓히는 동시에 민족의 반일력량을 키워나갔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김원봉은 남경에 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양성했을뿐만 아니라 남경에 모인 여러 당파들과의 련대를 강화하고 전민족의 대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힘썼다. 1932년 10월에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의렬단, 광복단(光复团)을 비롯한 단체들이 상해에 모여 대일전선통일동맹(对日战线统一同盟)을 결성하였다.

김원봉은 또한 1935년 7월 4일, 5개 당파단체들을 규합시켜 《조선민족혁명당》(朝鲜民族革命党)을 창당하였다. 남경 금릉대학강당에서 소집된 창당대회에서 일제에 항격하여 독립을 이룩하고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원칙을 토대로 당의 강령과 정책을 확정하였고 676명 당원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新韩独立党), 대한독립당, 조선의렬단 5개 단체의 해체를 선포하고 조선민족혁명당에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내 조선인 반일투쟁의 가장 큰 당으로 되였다. 김규식이 당주석을 맡고 김원봉이 총비서로 선거되였다.

1937년 일제가 남경을 공격하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 본부를 거느리고 남경을 철수하여 무한으로 갔다. 무한에서 그는 여러 혁명군사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재규합하여 중국항일전쟁시기 중요한 역할을 일으킨 조선의용대의 창립을 이룩해냈다.

천녕사 유적지를 보고나서 답사팀은 귀로에 올랐다. 설레이는 대나무숲으로부터 씩씩한 조선청년들의 노래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듯싶었다.

《꽃피는 고국은 빛 잃고 물이 용솟음치듯 대중은 들끓는다.

억압 받고 빼앗긴 우리 삶의 길 들끓는것만으로 되찰을수 있으랴.

갈 길 방황하는 동포들이여 오라 이곳 배움의 마당으로.

조선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여 가슴의 핏줄기 들끓는 우리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다 눈물 머금고 결의 굳게 모두 일어서라.

한을 푸는 성스러운 싸움에 필승의 의기 이곳에 용솟음친다.》

/김성룡 글 조선옥, 조향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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