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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2)—남창봉기 상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22 10:04:02 ] 클릭: [ ]

국민당이 손중산의 삼민주의 혁명사상을 배반하고 총칼을 중국공산당에게 돌림에 따라 중국의 제1차국내혁명은 실패하고말았다. 국민당은 도처에서 공산당을 살해하고 로농대중의 반제반봉건투쟁을 탄압하였다. 중화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였다. 백성들은 끊임없는 전란을 겪게 되였고 더욱 많은 군벌들이 세력확장을 위해 갖은 수단을 써가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였다. 그러나 혁명의 불씨는 영원히 꺼버릴수 없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의 력사적과업과 피압박인민의 해방투쟁과업을 짊어지고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동방피압박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싸우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쟁의 길에 나섰다.

(권립 교수)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에 주은래, 하룡, 엽정, 주덕 등의 지휘밑에 우리 당의 영향권내의 3만여명 전투원들이 남창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국공합작을 배반하고 로농대중의 대학살을 감행한 국민당반동파에 대한 첫 반격이였습니다. 이 봉기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했던 우리민족 혁명가들중의 200여명이 참가했습니다.》

남창시 대표건물 등왕각(중국고대 4대 명루 중의 하나).

1927년 7월, 왕정위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와 합류함으로써 국민당내의 통일을 실현하고저 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7월 17일, 드디어 왕정위의 무한정부 군사위원회는 장개석을 토벌하기 위한 동정을 결정하였다. 무한정부의 통제를 받던 각 부대는 장강을 따라 강서 경내에 들어왔고 장개석도 부대를 포진하였다.

7월하순, 주은래를 대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은 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있는 군대를 동원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남창경내에는 엽정이 거느린 11군 24사의 만 2천여명 전사들이 구강에 주둔하고있었고 하룡이 거느린 20군 만 2천여명 장병들도 구강에 도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창에는 주덕이 지휘하는 군관교육단(军官教育团)이 있었고 제4군 25사의 공산당원 주사제(周士弟)가 거느린 천 5백여명 장병들이 남창부근의 마회령(马回岭)에 주둔하고있었다.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당이 장악하고있는 이 부대를 동원해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답사팀이 영웅의 도시 남창시를 찾은 것은 2004년 2월 14일이였다. 강서성 소재지인 남창시는 20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고도(古都)이다. 한(汉)나라 초기에 도시가 형성되였고 옛날에는 예장(豫章)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후에는 남방창성(南方昌盛)이라는 뜻으로 도시이름을 남창이라고 했다. 남창시는 장강 지류인 감강(赢江)을 따라 장강수로와 이어져있고 륙지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경구철도가 이곳을 지남으로 장강이남의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창봉기 기념관(강서대려관 건물, 봉기당시 지휘부로 사용)

남창봉기 기념관은 남창시 중산로(中山路) 세마지(洗马池)에 위치해있었는데 번지수는 중산로 48번이였다. 기념관에 도착하니 회색 4층 건물이 나타났다. 벽돌과 콩크리트를 혼합해 만든 중서결부의 회(回)자형 건물이였다. 건물 앞에는 남창봉기의 주요 지도자들인 주은래, 주덕, 엽정, 하룡, 류백승의 동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붉은기가 펼쳐져 있었다.

기념관 부관장 조가천(曹佳倩) 녀사가 기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조가천녀사의 안내하에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관 건물은 책에서나 영화에서 많이 보아온 20년대 강서대려사(江西大旅社)건물이였다. 1922년에 축조된 이 건물은 당시 남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였다. 봉기를 앞두고 하룡이 호텔을 세맡아 봉기총지휘부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주은래를 비롯한 남창봉기 주요지도자들이 이곳에 거취하면서 봉기준비를 하였던것이다. 지금 건물은 모두 남창봉기 유물과 사진 전시실로 사용되고있다.

조가천 녀사는 당시 남창봉기에 관련해 이야기하였다.

기념관의 조가천부관장.

(조가천 녀사) :《이쪽은 남창봉기를 령도한 5명 지도자의 동상입니다. 가운데 주은래이고 그곁에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입니다. 지금 보는 이 청사는 봉기총지휘부로 사용되였습니다. 강서대려사는 1924년에 축조된 건물로서 1층에 전적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8월 1일 새벽 2시 봉기군 2만여명이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적 총지휘부를 공격하는 전투, 남창공원을 점령하는 전투, 수관음정전투가 비교적 치렬하게 진행되였는데 많은 조선인 전사들이 이러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4시간 전투를 거쳐 봉기군이 남창을 점령하였습니다. 남창봉기후 주덕이 거느린 부대는 정강산에서 모택동부대와 회합하여 중국로농홍군 4방면군을 편성하였습니다.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 대해 첫 총성을 울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8월 1일은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로 계속 기념하고있습니다》

남창봉기는 주로 공산당이 장악하고있었던 혁명군정규부대에 의지해 이룩한 봉기이다. 무창수비를 맡았던 엽정부대는 장개석 남경정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구강에 이르렀다. 엽정이 거느린 11군 24사에는 길림성 룡정의 개산툰진 출신인 박인, 흑룡강 녕안의 방월성과 김철강을 비롯한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다.

7월말 엽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남창에 주둔하였다.

2월 14일은 서양인의 련인절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련인절을 쇠는것이 성행했기때문에 남창의 거리는 판촉활동으로 소란스러웠다. 거리에서는 생화를 들고다니는 젊은 련인들의 밝은 모습을 쉽게 찾아 볼수 있었다.

남창에 들어온 엽정은 백화주(百花洲) 동호(东湖)곁에 위치한 심원중학(心远中学)에 11군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백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남창 심원중학교는 지금 남창시 제2중학교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당시 엽정의 사령부옛터를 지금까지 보존하고있었다. 새로 축조된 학교 주청사와 운동장을 지나니 해묵은 나무 두대가 우거진사이로 낡은 벽돌건물이 보였다. 가까이에 가보니 2층으로 된 건물이였는데 건물정면에는 <엽정 지휘부 옛터(叶挺指挥部旧址)>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엽정은 2층에 지휘부와 전화통신실을 설치하고 아래층에 경위원을 들게 하였다. 엽정은 이곳에서 남창봉기의 천주교회당(天主教会堂)전투, 공원(贡院)전투, 신영방(新营房)전투를 지휘하였던것이다.

 

남창 심원중학교내에 위치한 엽정지휘부 옛건물.

엽정부대가 구강을 거쳐 남창에 진입하였을 때 제2단계 북벌에 참가해 혁혁한 공헌을 세웠던 하룡부대도 구강을 거쳐 남창에 왔다. 독립 15사단으로 북벌전에 참가한 하룡부대는 수차의 전투에서 승전하고 20군으로 확대되였던것이다. 이 부대에는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를 비롯한 수십명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도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 의렬단 단원이였던 류자명(柳子明)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민당의 탄압이 컸기때문에 조선혁명가들도 피해를 보았다. 제6군 포병영 영장이였던 리검운은 소속부대에 체포되였고 부영장인 권준과 부관인 안동만(安东晚)은 각기 호남성과 남경으로 피신했다. 시국이 이처럼 살벌해지자 김원봉은 무창을 떠나 구강으로 갔고 거기에서 하룡부대에 편입되였던것이다.

7월 25일, 왕정위와 장발규가 려산(庐山)회의를 소집하고 하룡을 불렀지만 그는 응하지 않고 남창의 중화성공회(中华圣公会)에 20군 지휘부를 설치하고 공산당과 함께 남창봉기를 준비하였다.

하룡의 20군 지휘부 옛건물.

하룡의 20군 지휘부 옛터는 자고로(子固路) 165번지에 위치해있었다. 원내에는 두개 청사가 있었는데 모두 벽돌, 기와로 된 건물이였다. 당시 하룡은 한 건물을 20군 군부사무실로 쓰고 다른 한 건물에서 류백승(刘伯承), 운대영(惲代英)과 함께 거취하면서 사무를 보았다.

원래 중화성공회 굉도당(宏道堂)의 건물이였던 하룡지휘부 옛터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있었다.

엽정부대와 하룡부대가 남창에 입성함에 따라 공산당이 장악한 부대가 우세를 차지하게 되였다. 이 두 부대와 주덕이 거느린 군관교육단의 부분적인 장병 그리고 남창부근의 회마령에 주둔한 주사제의 부대까지 합치면 총수가 3만 8000여명에 달했다.

이때 강서경내는 국민당 제5로군(第五路军) 총지휘인 주배덕(朱培德)이 수비를 맡고있었다. 주배덕은 남경정부와 무한정부사이에 끼여 시국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있었다. 그는 주력부대인 3군을 길안(吉安)에 주둔시키고 9군을 동향(东乡), 진현(进贤) 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남창시와 근교에는 제5로군 총지휘부와 경비단(警备团) 그리고 부분적인 부대만 있었다. 적의 총수는 약 만명 정도였다.

7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사업을 책임진 주은래가 남창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덕의 집에 머물면서 앞서 도착한 리립삼, 운대영, 팽배(彭湃) 등과 만났다. 그들은 강서대려사에 모여 중국공산당 전적위원회(前敌委员会)를 설립하고 봉기문제를 자상히 토의하였다. 주은래가 전적위원회 서리를 맡고 하룡을 남창봉기 총지휘로, 엽정을 전적총지휘로, 류백승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회의에서는 7월 30일에 봉기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봉기준비가 바야흐로 성숙되여가고 있을 때 장국도가 중앙의 대표신분으로 봉기에 간섭해나섰다. 29일 그는 두차례 전보를 보내 심중하게 폭동해야 한다고 부탁하였다. 7월 30일 장국도는 구강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급급히 남창에 왔다. 그는 봉기를 앞두고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대회에서 장국도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극력 봉기를 늦추어 진행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은래, 운대영, 팽배, 담평산을 비롯한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이 단호히 장국도의 건의를 부결하였다. 대회에서 주은래는 전적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작전명령을 작성하였다. 명령은 남창의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8월 1일 새벽 4시부터 성내외에 주둔한 적들을 공격한다고 하였다.

7월 31일 밤,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고 주변은 쥐죽은듯 고요했지만 강서대려사만은 불빛이 휘황하였다. 봉기총지휘부에서 사람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봉기시각을 시다렸다.

수만명 봉기장병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만단의 준비를 끝내고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어둠이 뒤덮인 중국의 암흑을 깨칠 그 시각은 한초한초 다가오고있었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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