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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연변추억11] 1991년 여름 장백조선족자치현에 가보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0-15 10:33:58 ] 클릭: [ ]

아키코녀사의 장백조선족자치현 추억

1991년 당시 장백현성 거리모습

조선족에 대한 아키코녀사의 추억은 연변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요즘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창립 60돐을 맞이했다는 우연한 화제에 아키코녀사는 27년전의 이야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은 너무 멀었다.‘장백’이라고 하면 장백산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이 짙은 력사의 흔적투성이였다.

1991년 8월, 네번째로 되는 연변방문시의 일이다. 연길시에 살고 있었던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리사장이였던 한준광선생의 알선으로 실현된 일주일간의 장백현 려행이였다. 차안에서의 왕복 4일간과 장백현에서의 3박이라는 그번 려행은 행정사학회가 마련해준 찌프차 그리고 학회 사무주임인 박성경씨와 운전수인 김상희씨, 이 두 젊은이들의 동행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해 7월 장백자치현이 대외개방을 시작한지 20일만에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한 외국인이였다. 그것도 일본사람이…

찦차를 타고 장백현으로 오가는 길에서

아침 일찍 연길을 출발한 찌프차안에서 남편은 지도를 한손에 든채 스쳐지나는 창밖의 풍경을 지도와 대조하고 있었고 나는 곁에서 현의 중심지까지 가면서 치마저고리모습의 녀성들이며 조선말을 주고 받는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현중심지인 장백진에는 산너머 또 산을 넘어야 닿을 수 있었고 창밖으로 스쳐지나는 짙푸른 삼림과 끝없이 이어지는 넓은 농지에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 참외다!”

남편의 큰소리에 찌프차는 급정거했다. 길가에서 짚을 펴놓고 그우에서 팔고 있는 참외를 발견한 것이였다. 한시간쯤 달려 온 연유였을가 참외는 특별히 맛있었다.

장백가는 길에 만났던 길가 참외난전

또 한참을 달리다가 길옆에 세워져있는 <승리판점>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하늘색으로 칠한 판자문은 량쪽으로 활짝 열려있었고 문기둥에는 중국의 전통색상인 빨간색종이로 만든 황즈(幌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문에 들어 서 보니 식사하는 곳은 구석쪽에 위치해있었고 마치 영빈관과도 같은 분위기의 풍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틀림없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줄거라고 생각한 나는 식당녀주인과 아이들에게 “니호우”라는 인사 한마디와 웃는 얼굴만으로 금방 친해졌다.

첫 장백현행이라 길을 잃기도 하고 고생이 많았지만 젊은 조선족 두 청년의 씩씩함과 인내성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처음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 광대한 중국의 일면과 사람들의 넓은 도량에 도취되였다.

장백현 행길에서 수고한 젊은 조선족 두 청년(오른쪽 두사람)

찌프차는 다섯시간좌우 달리고 나서 잠간 쉬고 길가에서 파는 신기한(우리 부부한테는) 먹거리들을 사먹군 하면서 또 달렸다. 12시간 달리는 동안 뻐스 한대밖에 만나지 못한 채 3메터정도의 넓은 길을 마치도 전용도로를 달리듯 질주했다. 지나가는 창밖의 푸른 수림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얼마후 밤장막이 내리고 밤길에 겨우 찾은 국영장백산려관에서 몸이 녹아버리듯 곯아 떨어졌다.

멀리서 바라본 장백현성의 모습

이튿날 아침 장백진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너무 긴장해있었다. 마중나온 장백조선족자치현 민족사무위원회 허영복씨가 슬며시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주었다. 50대 초반의 작은 체구였으나 정갈한 얼굴의 남성이였다.

“먼저 이 마을의 뒤산에 있는 탑산공원의 일본인무덤을 안내해드리죠”

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타고 간 찌프차로 탑산공원을 향했다.

아키코녀사 일행을 따뜻이 맞아준 장백조선족자치현 민족사무위원회 간부 허영복(왼쪽)

820메터정도의 작은 산정에 올라가니 발해시기에 세웠다는 길림성의 중점문물인 13메터의 5층 기와 영광탑이 서있었고 그 맞은켠에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었다. 79개 토분의 대부분은 한족렬사이고 조선족렬사가 한사람이라고 했다.

비석들사이를 벗어나 그 조선족렬사묘지를 찾아 올라가 보니 묘비우에 짙은 분홍색 코스모스꽃 한송이가 놓여져 있었는데 바람에 날리우지 않게 작은 돌에 눌리워서 하늘거렸다. 나는 가슴에 북받치는 무언가를 느끼면서 “ 아…장백진은 조선전쟁때에 최전선이였었구나…”라는 생각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머리를 깊이 숙였다.

조선족렬사 묘비

그때 산우에서 초췌한 모습의 로인이 내려와서 일본인의 무덤이 제일 앞줄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올라가 보니 무덤 세개가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출신에 1947년 3월 9일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세개의 무덤주인이 모두 후쿠오카출신이고 사망시기도 같았는데 그중 한사람이 녀성이였다. 국민당과의 국내전쟁때에 팔로군병사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고 담가에 들리워서 장백진에 옮겨진 후 사망하였다고 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지만 이 세 일본사람은 팔로군으로 싸우다가 희생되였기 때문에 이 땅에 묻기로 하였습니다.” 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전신이 오싹해나면서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부모님들은 당신들이 이 땅에 묻혀있는것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웨쳤다.

비석뒤에는 어수선한 작은 묘지가 있었다. 나는 손으로 어루쓸면서 눈물을 흘렸다. 비석앞에 놓여진, 시들기 시작한 노란색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장백현 거리 일각

장백현의 거리는 북을 향하면 중국의 산이고 남을 향하면 조선의 산이며 압록강을 따라 동서로 조금 열린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다. 거리에서 보면 초가집은 한채도 없고 주택도 상점도 모두 콩크리트집이거나 벽돌집뿐이였다. 시장에서 쇼핑하는 이들도 모두 느긋한 모습들이였다.

연길시에 비하면 활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대신 생활수준의 격차가 그다지 없는 것 같았고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보였다. 인삼 재배가 성행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일면도 있는 것 같았다. 인삼의 고향으로 불리울 정도였으니…

조선족인구가 현인구의 17~18%라는 비률 때문이여서인지는 몰라도 시장거리에서 치마저고리모습의 녀성들을 두세사람 정도밖에 볼 수 없었다.

시장거리에서 만난 조선족 모자

남편은 방문기간중 꼭 조선족학교에 가보고 싶고 문학자들과 만나고 싶다고 청을 들었다. 우선 록강(緑江)소학교에 안내 받았다. 유서깊은 록강소학교는 내가 태여난 해인 1938년에 창립된이래 줄곧 조선족학교로 유지되고 있었다. 교정에는 그네, 철봉 등 놀이기구가 있었고 흙으로 된 운동장도 깨끗이 정비되여있었다. 화단에는 코스모스꽃과 백일초가 활짝 피여 있었다.

록강소학교 입구

당시 록강소학교에는 조선족학생 446명, 조선족교원 38명이 있었는데 그중 22명이 녀성교원이라고 했다. 장백진내의 조선족 자제의 92%가 록강소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조선족중학교인 장백2중으로 찾아 갔다. 1946년 6월에 창립된 장백2중은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가 같이 운영되고 있어 이미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했다. 당시 재학생은 400명이였고 53명 교원들은 모두 조선족이였으며 그중 26명이 녀성교원이라고 했다.

장백현성 길거리에서 만난 민족복장차림의 조선족녀성

중국사회에서 소수민족교육은 곤난한 문제가 없을가. 단순한 나는 녀성교원이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장백진에서 3일간 숙박했던 장백려관은 한어가 위주여서 한어를 모르는 나는 우왕좌왕 수화거나 손시늉으로 대화를 했다. 장백2중에서도 교원회의에서는 한어로 집행하였다.

나는 장백현에 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을가. 내 마음속의 갈등은 태산 같았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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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코씨의 추억을 담은 당시 장백현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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