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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족]행정서사와 부동산업무를 병행하는‘일욕심쟁이’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8-06 10:17:21 ] 클릭: [ ]

일본에서 미지의 령역에 도전장을 내밀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김순숙씨

명랑하고 소박하며 플러스식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좋은 기업인 김순숙씨

“새끼를 잘 꼬지 못하는 엄마가 안타까워 방과후 몇시간씩 대신 새끼를 꼰 적이 있었습니다. 물도 엄청 많이 길어 봤어요”

항미원조 전선에서 돌아 온 포상으로 받은 전업국이라는 단단한 직업을 뿌리치고 형님을 모시고 살겠다며 회룡현 투도진 룡명촌에 내려 간 아버지 김윤희씨, 그의 다섯번째 딸로 태여난 김순숙이의 어린시절 추억거리는 거의 이런것들뿐이다.

투박한 농촌의 그 막막함과 ‘다섯금화’의 막내라는 당돌함이 뿌리깊은 가난에 도전하고 출세를 꿈꾸게 하였다. 다행히 기억머리가 남달랐던 그녀는 학교졸업과 함께 화룡현 수리국 산하 투도수리소라는 ‘벼슬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357원이라는 기본월급은 몇번 받아 보지 못한 그녀였다. 월급은 쌀과 석탄 등 명목으로 년말에 지불되는것이 보통이였고 겨울에는 할일이 별로 없다는 리유로70%밖에 지불받지 못한채 학생들처럼 ‘방학’이라는 혜택을 받군 하였다.

젊은 나이에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자극없는 매일매일을 보내는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한 직업보다 수입이 필요했다. 성에 차지 않은 ‘벼슬’을 내려 놓고 순숙이는 1997년 11월에 일본류학을 결심했다.

“천문학적 수자였어요. 10만원을 몽땅 꿔가지고 나온 류학이였습니다.”

어벌짝이 크다는 말을 들을 만도 했다. 단술에 배가 부를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빚 구덩이에 빠져버린 순숙이는 도꾜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조급해나기 시작했다. 우선 구인잡지를 사들고 공중전화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모집합니까?”

겨우 번지는 한마디에 “하이”라는 전화 저쪽의 반응만 바라고 매일 몇십곳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좀체로 알아 들을수 없었다. “에이~” 알아 듣지 못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무작정 전화기를 내려 놓고 또 다른 번호를 돌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시름놓고 잠을 잘수 있었던 그녀였다.

그러던 하루 “아라이바(설거지) 모집합니까”로 잘못 말이 나가는 바람에 끝내 “하이”라는 대답을 듣게 되였고 시급 1000엔짜리 고급스시집의 설거지일을 찾게 되였다. 그렇게 고달픔을 모르는 ‘욕심쟁이’ 김순숙씨의 일본생활이 시작되였다.

요즘 들어 많이 알려진 일본류학생들의 초기생활에 비해 그녀가 여태 경험한 업종들은 다양하기로 특별하다.

일본어학교를 졸업한후 도꾜세이즈(製図)전문학교에 첫번째 류학생으로 입학하여 건축기계도면설계를 배운 순숙씨는 류창한 일본어와 단단해진 배포심을 지니게 되였다. 정체원(整体院), 이자까야(居酒屋)에서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와는 달리 건설회사의 사무직 일을 하게 된 그녀였지만 편안해진 형편이 또다시 그녀의 욕심을 자극하였다. 아예 류학공부중인 남편과 함께 창업을 시작했다.

그들 부부의 일욕심에는 혀가 차질 정도이다. 부부가 정체원을 오픈하고 찌라시를 뿌리던 일이며 자전거로 우유배달을 해서 벌었던 짭짤했던 수입이야기며 혼인소개소를 꾸렸다가 좌절당했던 일이며 이사센터와 드라이클리닝배달, 우편물배달센터를 꾸렸던 일이며 … SNS가 아직 보급되지 않았던 그때 전화련락과 지도책을 무기로 해야 했던 배달업무가 가져다 주는 막심한 곤난도 수없이 겪었다. 하지만 고생했던 일들을 돌이키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그늘이 없었다. 지난 경험이 오늘날에 좋은 ‘비료’가 된다는 그녀였다.

김순숙씨가 외국인들, 특히 재일조선족들이 여러가지 비자신청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은 2005년도 쯤이였다. 처음으로 알게 된 <행정서사>라는 업종에 무척 흥미를 느끼게 된 그녀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공부를 결심했다.

일상생활중 혹은 회사운영중의 사람들 의뢰를 받고 <내용증명서>, <상속수속>, <회사설립>, <개업수속> 등 지방관청에 제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러 서류의 작성과 신청을 대행하는 업종이 바로 <행정서사>이다. 단순한 서류작성으로부터 복잡한 컨설팅업무에 이르기까지 허가,인가에 관한 근 만종류에 달하는 업무내용을 갖고 있는 행정서사는 민간과 행정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민법, 행정법, 헌법, 회사법, 상법을 좔좔 내리 외울 정도로 익숙히 장악하고 리해해야 하며 일본어능력은 더 말할나위가 없다. 너무 어려운 공부였다.

일본은 자격증사회이다. 일욕심에 못지 않게 배움과 자격증에도 의욕이 넘치고 끈질긴 순숙씨지만 첫 몇번은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준비없는 시험에만 도전했다. 나이 서른을 먹고 하는 자격시험공부는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았다.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아들애를 키우면서 살아갈 앞날에 더 이상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여 마지막 2년간의 본격적인 자습을 통하여 2009년 시험합격과 동시에 이듬해 4월에 행정서사증을 받았으며 여러가지 복잡한 등록과정을 원만히 마치고 2010년 6월부터 정식으로 행정서사업무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행정서사>라는 광고문으로 신문에 광고를 내자마자 여러곳으로부터 의뢰가 들어 왔다. 아직 호적등본을 보는 업무에도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를 찾아 오는 재일중국인들, 한족과 조선족을 포함하여 대부분이 일본인 행정서사에게 자기의 뜻을 원만히 전달할수 없는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조선족행정서사의 출현은 그야말로 <가물에 단비> 격이였다.

개업하여 한달만에 맡았던 리혼한 일본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이의 재산상속수속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류학비자, 가족비자, 취직비자, 영주비자, 회사설립, 투자경영, 정주비자, 일본인배우자비자, 흥행(연예인) 비자, 풍속영업허가 등 근 천여건의 수속을 90%이상의 성공률로 대행할수 있은데는 선배님들을 포함한 주위사람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한테 ‘안정된 현실’은 ‘도전’의 전야이기도 하다. 8년째 행정서사업무를 보면서 여러 계층의 고객들과 만나게 된 순숙씨는 주택구입에 대한 중국인들의 수요가 나날이 늘어감을 실감했다. 여러 고객들을 부동산에 소개시켜 주는 과정에 언어소통의 능력과 행정서사자격을 지닌 자신이 또 한걸음 내디딜 여유가 있음을 발견했다. 우선 2017년 10월에 택지건축물거래사(宅地建物取引士)시험에 무사히 합격한 그녀는 2018년 1월에 부동산투자회사인 토카이(東海)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신구사업에 드바쁜 날을 보내면서도 최근에는 믿고 맡기는 NPO법인설립과 간호(介護)사업지정허가신청의뢰를 마다하지 않고 미지의 령역에 처음으로 도전하여 성공했다. 행정서사와 부동산업무를 병행하면서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것에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살길이 막막한데 비자때문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의 손님들을 위해서 어려운 비자문제를 해결했을 때는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특히 할수없이 강제송환을 받아야 하는 손님들을 대신하여 정당한 비자를 받았을 때에는 같이 눈물도 흘렸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거주자격인 비자문제와 살아 가야 할 주택문제가 가장 큰 의난점이 아니겠냐며 융자문제를 더한층 쉽게 해결할수 있는 또다른 대리점자격에 대한 도전을 선포한 김순숙씨이다.

네살난 아들애를 보육원에 맡기면서 시작했던 초창기의 아픔외에는 별로 좌절을 느껴 본적이 없다는 그녀, 명랑하고 소박하며 플러스식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좋은 기업인 김순숙씨의 다음 ‘욕망’이 더없이 궁금해진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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