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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중국조선족력사(3)]―고난의 조선족 간민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7-10 15:24:13 ] 클릭: [ ]

문전옥답 치발역복하지 않았다고 정부에 빼앗기고

사지안에 들었다고 영문 모른 채 점산호에 빼앗기고

1881년, 청정부 황무지개간 위해 조선간민에 우대정책 …

 
이주초기 조선인부녀들의 석마찧기

조선간민구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황무지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훈춘녕고탑초간 장정>을 반포, 당해 토지를 받은 호들은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 상에 660문(文)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 후에 갚게 하며 그 나머지는 한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간민들에게 부림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빚을 갚게 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했다.

1885년에 와서 간민전문개간국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의의에 대하여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 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토지를 개간할 수 있는 합법적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많은 조선족들이 연변땅에 들어왔기에 그 후 민족공동체형성에 중요한 조건을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한편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정부에서 관황(官荒, 관청의 황무지)을 조사하여 풀어놓는 기회에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5년내에 조세를 받지 않으며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자금을 선대해준다는 좋은 조건으로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런 좋은 조건은 조선농민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여 수많은 조선농민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게 하였다. 농민들은 두만강연안의 4개 보, 39개 사로부터 해란강 이북과 부르하통하 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 쪽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괴나리보짐을 풀고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조선인 농민들의 벼모내기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 2백리 땅이 조선농민들에 의해 전부 개간되였을 뿐만 아니라 해란강 이북지역과 가야하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초간총국 설치시의 조사에 의하면 당지에 숙지가 적잖았는데 훈춘지방에 5620헥타르, 남강지방에 만 8938헥타르, 오도구지방에 3073헥타르, 흑정자지방에 144헥타르 있었다. 훈춘변황후선지부 리금용의 조사에 의하면 가야하로부터 고려진 북안에 이르는 구간에는 이미 8곳이나 개간되였는데 그 면적은 2000여헥타르에 달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야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지방에 쳐들어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 연변지구와 조선 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실색한 연변지방 관리들과 군경들은 길림으로 꼬리를 사렸다. 그 기회에 조선 간민들은 연변지구에 더 많이 이주하였는데 1909년에 이르러서는 3만 4133세대에 18만 4876명으로 늘어났다.

치발역복 귀화입적

1891년, 청정부에서는 화룡 월간국과 통상국을 무간국으로 고치고 이듬해에는 무간총국을 국자가에 옮겼으며 조선족의 호적을 조사하여 4개보, 39개 사에 편입시키고 조선족을 청나라 신민으로 인정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류병호선생은 《조선족에 대한 청나라의 ‘편적위민’ 과 ‘치발역복’ 정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족 간민에 대한 청나라조정의 편적위민은 민족동화를 목적으로 한 치발역복을 기초로 하였다. 근대적 국적법을 아직 수립하지 못한 청나라조정은 입관 시에 관내 지역의 한족인민들에게 강요하였던 치발역복정책을 200년후 조선으로부터 이주하여온 조선족 간민들에게도 강요하면서 이를 토지소유권을 부여하는 전제로 삼았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족 간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것은 령토주권을 버리는 것과 같으므로 치발역복하여 만족으로 동화된 조선족 간민만이 청나라의 신민으로서 토지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물론 이런 정책을 조선족 간민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백의흑관은 조선민족의 상징이요, 상투와 머리태는 남성의 성가여부를 상징하는 표징이였다. 장기간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상하간의 례의와 타문화에 대한 배타주의사상을 길러 온 조선민족은 조상이 물려준 백의흑관을 버리고 호복(만족복장)을 갈아입고 부모가 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는 것을 조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참으로 머리 우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피땀으로 걸구어온 옥답을 빼앗기고 지어 가장집물까지 털린 후 강 건너 설음의 고향땅으로 쫓겨갈 판이였다.

그렇다고 만주호적에 든다는 것도 조상들에게 죄스러운 일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굶어죽으면 죽었지 ‘치발역복, 귀화입적’하지 않는다면서 문전옥답을 버리고 떠나가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앉아버티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관부에서 순찰할 때만 호복에다 머리를 풀어 땋고 평소에는 여전히 한복차림을 했다.

논농사를 하고 있는 1920년대 북간도 조선인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후 짜리로씨야가 연변을 침략하자 연변지방의 관리들이 길림으로 도망치는 통에 치발역복바람이 즘즘해졌다. 하여 치발역복하였던 많은 조선족들은 다시 민족복장을 입었다.

점산호와 조선족 지주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지방관리와 군벌, 대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그들은 권세를 등대고 청장(淸丈, 토지를 재주는 일 따위)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무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꽂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또 어떤 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 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하였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상인들을 가리켜 ‘점산호’라고 하였다. 그때의 정경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점산호들이 차지한 토지면적은 토지증명서에 ‘동쪽은 수림이고 서쪽은 강이며 남쪽은 수림이고 북쪽은 개울’이라고 써넣고 이것을 ‘사지(四至)집조’ 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사지를 정해놓으니 개간민의 토지도 사지안에 들어갔다. 관청에서 비록 경작지를 다시 측량하고 등록된 면적을 초과했을 때는 ‘부다지(浮多地)’로 처리하여 땅세를 받아들였으나 그것 역시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아 조사해내지 못한 토지가 많고 또 조사해냈다 해도 우선권이 점산호들에게 있어서 땅세를 바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개간민들은 웬 영문인지 모른 채 피땀으로 일군 문전옥토를 점산호들에게 점령당하고 빈주먹으로 나앉게 되였다.”

거기에다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하지 않은 개간민들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관청에서는 치발령을 어긴 자에게 기한을 정해 토지를 한족 지주나 한족 이주민에게 넘겨주도록 강요하면서 기한내에 넘겨주지 않으면 강 건너 조선땅에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조선개간민들은 자기 손으로 가꾼 토지를 점산호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나 고농으로 전락되였다.

1920년대 벼가을하고 있는 조선인 이주민

조선이주민 속에서도 대지주가 나타났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관청과 점산호들에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의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든 덕에 점산호들로부터 몇백헥타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지주가 된 것이다,

‘변발호복’ 하여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 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 간민을 모집하여 황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였고 일부 사람들은 관부와 결탁하여 기타 귀화입적하지 않은 간민들을 고용하여 황지를 개척한 뒤 자기 이름으로 령조납세(领照纳税)함으로써 일약 수십헥타르의 토지를 점유한 지주로 되였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의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싼 땅값에 끌리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솔가이주하여 일약 수십헥타르의 황무지를 소유한 지주로 되였다.

/연변일보사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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