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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편집/기자: [ 전춘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11 14:37:09 ] 클릭: [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현재 나는 가수, 품바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중 조선족으로서 품바연기자로 되였다는 게 의미가 크다. 그것은 중국조선족으로서는 첫 사람으로 이 독특한 예술을 배우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2012년도에 조선족을 위주로 ‘아리랑 난(란)타’예술팀을 창립했는데 현재 명성이 높아 많은 행사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이와 같은 재간을 익혔는가고 자주 묻기도 한다. 이에 나는 한국에 와 스승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의 경력을 말하자면 한국에 입국한 초기단계인 1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한국에 들어와 뭘할 것인가 곰곰히 생각던중 어느 하루 한 지하철역과 멀지 않은 곳을 지나다가 각설이 타령 연기를 보게 되였다. 경쾌한 음악에 멋진 연극,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만담을 들으면서 세상 이렇게 재미있는 공연이 있는가 탄복하게 되였다.

중국에 있을 때 각설이 타령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이처럼 직접 관람하기는 처음이다. 나는 전에 중국에 있을 때 가수로 있으면서 가끔 연극에도 참여한 일이 있다. 이날 각설이 연기를 보면서 이거야말로 나의 적성에 맞는 연기예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나는 대담하게 각설이 연기자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준 아랑이 선생이다. 인사를 나눈 후 좀 배워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조선족이란 걸 알고는 아예 도리머리를 저었다. 나는 대뜸 배움에 무슨 한국인, 조선족이 있는가고 내 나름의 도리를 따져가며 열심히 배우겠으니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결국 나는 억지다짐으로 그의 제자로 되였고 이로써 나의 한국생활은 남다른 뜻을 갖고 시작되였다.

이튿날부터 나는 아랑이 선생을 모시고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품바는 사실 종합예술이다. 가위, 춤, 노래, 꽹과리, 북 등 모두 장악해야 한다. 또 일단 무대에 나서기만 하면 몇시간 계속 말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니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쉽지 않게 얻은 기회인 만큼 모든 정력을 다해 노력했다. 전에 가수, 연극 동을 하면서 다져놓은 기초가 있어서일가, 진전이 빨라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선생은 나에 대해 하나 배워주면 둘을 알고 배우는 속도도 상상외로 빠르다고 칭찬하면서 역시 알심 들여 가르쳐주었다.

다른 건 모두 괜찮았으나 발음과 톤에서 애를 먹었다. 필경 연변식의 말투는 안되는 것이였다. 나는 입에 저가락을 물고 수십번, 수백번 련습하고 실천하면서 발음과 톤을 모두 바꿔야 했다.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6번 수강 후에는 직접 공연실습을 할 수 있게 되였는데 력대 제자들 가운데서 짧은 기간에 품바를 배워 공연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깼다. 조선족으로서 한국의 문화를 습득하고 한국예술인 행렬에 들어섰다는 게 너무도 기쁘고 행복했다. 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승으로부터 란타와 장구도 남 못지 않게 배웠다.

한편 한국의 좋은 예술문화를 나만 배우지 말고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에게도 전수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아리랑 난타’예술팀은 바로 이렇게 창립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 자신이 돈을 내 북 여덟개를 갖추고 우선 8명을 양성시키기로 하였다. 장소가 없어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련습했는데 도중에 경찰이 찾아와 제지시킨 일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북련습을 하는데 때로는 15시간씩 지속하다 보니 주민들로부터 신고가 들어간  것이다. 여러 사람이 북을 쳐대다 보니 그 소음이 강해 지하로 된 장소를 찾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란타팀은 현재 15개의 북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고수(鼓手)들의 수준도 어느 정도 높아 무대에서 장끼를 보여주고 있다. 요즈음은 장구강습도 펼쳤는데 인기 만점으로 많은 사람들을 흡인하고 있다. 국회 행사, 대통령 취임식 행사, 시청 행사, 시민청 행사, 독도 수호 행사, 개천절 행사 등 수없는 행사에 참가해 인기를 끌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예술생애도 평탄하지만 않았다. 연변 훈춘 태생인 나는 12살 때 <풍막수레>라는 인도노래를 불러 소문나면서 훈춘진수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되였고 매우 일찍 예술에 입문하게 되였다.

졸업 후에는 훈춘문화관 무도장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아버지한테서 배운 한국가요 〈황성 옛터〉, 〈삼다도 소식〉,〈알뜰한 당신〉, 〈고향무정 〉,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 손님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 후 도문, 연길 등지에서도 한창 무도장이 성행했는데 나는 각지 무도장에서 노래를 불러 오락계에서 알아주는 가수로 알려지게 되였다.

허나 오락계에서 노래를 불러 살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받는 돈은 얼마 안되고 게다가 밤낮으로 무대에 올라선다는 것도 힘든 일이였다.

나는 거듭 생각던 끝에 싸이판 봉제공으로 출국하여 7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싸이판 봉제회사란 감옥과 같은 곳이다. 40도 이상 고온으로 더운 고생은 물론 물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비물을 받아먹어야 했다. 처음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길들인다고 채찍질을 하며 일을 시켰다. 나는 싸이판에 있으면서도 잊지 않고 노래자랑에 참가하여 정수기를 수상해 좋은 물을 정화해 먹은 기억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싸이판에서 가혹한 경험을 하면서 나는 평생 이렇게는 살 수 없으며 그래도 다시 예술로 내 앞길을 창조해나가려는 꿈을 가지게 되였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지난 9월 30일, 나는 구로구 민회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여 란타, 품바, 노래 등 다채로운 종목으로 내가 한국에서 이룩한 예술성과를 수많은 관중들에게 선보였다. 그번 회의에서 나는 한국다문화중앙회 홍보대사로 위촉되여 또 한번 유관 부문의 긍정을 받게 되였다. 그리고 일전에 있은 영주 풍기 인삼축제 품바경연대회에서 으뜸상을 수상, 현재 대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국에 와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금후 이미 배운 문화예술을 조선족을 비롯하여 다문화사회에 널리 보급하는 작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란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불안감을 없애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치매와 우울증 방지에도 유익하다. 앞으로는 북과 장구가 대세다. 배우려는 사람 많다. 나의 모든 열정과 사랑을 모든 이들에게 쏟아 건강과 웃음과 행복을 주는 것을 나의 영원한 락이자 행복으로 간주할 것이다.

/전춘봉기자 대필 qcf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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